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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28. 2019

마음이 찢어지는 밤

고마운 이 찾기 프로젝트


좀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내 오랜 꿈은 화과자 집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120년 전통의 작고 오래된 화과자 집.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생계 때문에 청년시절 시작한 화과자 집으로, 할아버지와 부모님 대를 거쳐 마침내 내가 이어받아야 할 화과자 집.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에 "이깟 화과자! 이제 누가 먹어!"하고 집을 박차고 나왔지만, 바쁘고 벅찬 도시생활을 텅 빈 마음으로 이어가다 결국 쑥스러운 발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못해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충만한 기쁨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새벽 일찍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부모님과 함께 말없이 화과자를 빚는, "먹고 싶어서 혼났지 뭐야." 하고 궂은날 저녁,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며 부랴부랴 가게를 찾은 오랜 단골 님에게 마침 딱 하나 남은 화과자를 건네는, 그의 입가에 가만히 번지는 미소를 바라보며 하루를 닫는, 그런 후계자였으면 했다.


화과자가 그렇게 좋았어요?라는 질문에는 절대 아니오. 치킨 좋아하는 애들이 '우리 집이 치킨 집이면 좋겠어.' 하는 마음으로 화과자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120년 전통의 화과자 집 후계자를 막연히 동경하면서도 실은 화과자가 뭔지 잘 몰랐다. 언젠가 한번 티브이에서 스치듯 본 화과자가 굉장히 아름다웠고, 척 보기에도 정성이 많이 들어가보였고, 그래서 아무나 만들지 못할 거고, 당시에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이게 내가 화과자 집 후계자를 택한 이유였다. 타코야끼든, 닥종이 인형이든, 그 뭐든 상관없었다. 삶에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나는 어느 방향으로 나서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걸음도 떼지 못했다. 내게 '너무 많다'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와 같은 뜻이었고 나는 단 하나만을 원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좋든 싫든 묵묵히 걸어가야만 하는 단 하나의 길. 내가 대를 잇지 않으면 끊어지고야 마는 화과자 집 후계자의 삶 같은 것. 나는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케이크를 만든다


밤하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인생의 선택지가 두려워, 남몰래 화과자 후계자를 꿈꾸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수없이 선택을 하고, 후회하고, 눈물 흘리고, 다시 선택을 하면서 그렇게. 어쩔 수 없다. 나는 화과자 집 후계자가 아니었으니까. 화과자 집 후계자 타령은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고.



나는 지난 삼개월간,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떡케이크를 만들었다. 떡에 흥미가 생겨 한 두 가지를 배우다가 본격적으로 수업을 등록했는데, 어쩌다 보니 떡뿐 아니라 떡 위에 꽃 모양 앙금을 짜서 장식하는 앙금 플라워 케이크 과정을 듣게 됐다. 왼손은 반시계 방향, 오른손은 상하 수직운동을 해야 하며, 두 손의 온전한 하모니가 비로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워낸다는 사실을 첫날 알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화과자 집 후계자가 생각났다. 화과자 집 후계자가 아닌 것이 그토록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120년 전통이 내 손에서 한순간에 무너질 뻔했다. 화과자는 무슨.


퇴근하자마자 한 시간 여를 전철을 타고 달려 헐레벌떡 강의실에 도착해, 꼬박 세 시간을 서서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왼손, 오른손과 함께했다. 남들은 처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손끝에서 금방금방 장미며, 국화를 피워내는데 나는 어찌 이렇단 말인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 아니 나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세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꽃을 짜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정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창업이나 자격증을 목표로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어쩌자고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취미라고 하기엔 내게 벅찼다.



그 미소 한 번을 보려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완성된 꽃 케이크 때문이었다. 3주 간격으로 꽃 케이크 하나를 완성했다. 불린 쌀을 강의실에 비치된 제분기로 직접 빻아 떡을 찌고, 힘들게 만든 꽃을 올렸다. 꽃을 짤 땐 그렇게 끙끙거렸는데 케이크 위에 다소곳이 올라앉은 꽃을 보니 너무 예뻤다. 떡의 특성상 냉장고에 넣으면 쉬이 굳고 맛도 없어지기 때문에, 꽃 케이크는 바로 선물했다. 이 아름다운 케이크를 누구에게 안겨줄지 고민하는 일이 즐거웠다.


케이크가 무겁고 쉬이 상하다 보니, 케이크를 만들면 빨리 전해주고 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수업이 끝나면 밤 열 시쯤 되었는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 열 시가 넘어 친구를 만나 케이크를 건넨 날도 있고, 미용실 문이 닫을까 봐 허둥지둥 달린 날도 있다. 이 무슨 고생이야, 마음 한편으론 투덜거리면서.


실직 후 힘들어하는 선생님의 손에, 아이를 낳은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랜 친구의 품에, 미소가 예쁜 동네 미용실 원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동료에게, 요가원 원장님 부부에게 케이크가 배달되었다. 떡케이크를 받은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눈부셔서 내게 케이크가 오백 개 정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미소가 케이크를 건네는 내 손을 타고 어디로 흘러들어와서, 마음 한구석을 찢어놓았다. 그런 미소를 매일 볼 수 있다면 떡케이크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 고민했던 화과자 집 후계자 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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