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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05. 2019

돈이 내 발목을 잡는다

통장에 얼마 있어요?


난 아침시간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아침은 하루를 여는 첫 문이고, 처음은 항상 중요한 법이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조상들도 처음의 중요성에 대해 줄곧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시작이 반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음... 이건 아닌가) 아무튼.


여물지 않은 햇살 속에서 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틀어보면서 하루를 시작할 의지를 다잡는 아침, 의지를 채 다잡기도 전에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날 아침은.


출근하자마자 아침 회의가 있었다. 상사가 핏대를 올리며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의가 끝난 후 내 노트를 들여다보니 무심결에 끄적인 '돈이 내 발목을 잡는다'라는 문장이 만트라처럼 반복해서 적혀있었다. "좁쌀 크기로 써와!" 학교 다닐 때, 벌칙으로 에이포 앞뒤에 빡빡하게 써내곤 하던 영어단어처럼.



통장에 천만 원은 있어요?


수많은 자기 계발서를 보면 상상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만큼 상상할 수 있다. 수입은 곧 경험의 폭과 직결된다. 고급 스포츠카를 타봐야 스포츠카를 열망하지, 스포츠카를 타보지도 않았는데 뭘 열망한단 말인가.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들 하지만, 사람은 경험한 딱 그만큼을 열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고.


아무튼 나의 소중한 아침시간을 망치는 쓸데없는 회의에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든 생각은 '내가 왜 여기 앉아서 저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였고, 당연히 뒤따라온 생각은 '그만두고 싶다'였다. 진즉에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열망을 순순히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몇 번의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만두고 싶다'라고 생각했지 '그만둡시다'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수입이 없다는 공포감과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고 순간을 못 참은' 과거의 나를 향한 애꿎은 후회 따위가 뒤범벅되어 밤낮으로 나를 괴롭힐 게 빤했다.


지난겨울, 3개월간 잠깐 회사를 쉬고 소설 특강을 들은 적이 있는데 수강생 중에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겠다는 이가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설가 선생님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날렵한 국가대표 탁구선수처럼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통장에 돈 천만 원은 있어요? 충분할 거 같죠? 그걸로 턱도 없어요."


용기 있게 꿈을 향해 한걸음 내딛으려는 이에게, 첫발이 채 땅에 닿기 전에 가혹하게 무슨 돈 얘기인가 싶었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는 현실을 살아본 사람이었다. 등단을 준비하던 시절, 3천 원짜리 팥빙수 한 그릇 값이 아까워 부인과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싸웠던 어느 여름이 그에게는 있었다.


나는 몇 해전 눈이 펑펑 오던 겨울밤, 쌍팔년도 연속극처럼 캐리어 하나를 끌고 상경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어두컴컴한 밤이었고, 마침 몇 년 만의 폭설이라 눈이 푹푹 쌓여 한걸음 디딜 때마다 종아리까지 눈에 잠겼다. 남들에게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지만 내심 '자아를 찾겠다'는 거창한 포부 아래 서울로 올라온 것인데, 자아를 찾으려면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이지 왜 기껏 향한 게 서울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때는 너무 다니고 싶었던 회사와 너무 듣고 싶었던 강의와 너무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모두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을 향했다. 올라가기 하루 전날 어머니에게 통보했다. '나 내일 서울 간다. 손 안 벌릴 테니 말리지 마라.' 지금 생각해보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좀 받아도 됐을 텐데, 그때는 무슨 알량한 자존심이었는지.


서울은 어디든 월세가 비쌌고, 그때는 서울 생활이 처음이라 집을 보러 다닐 요령 조차 없었기 때문에 시세도 모르고 아주 작은 방 하나에 꽤 비싼 월세를 내고 머물렀다. 생계에 대한 공포를 그 무렵에 꽤나 적극적으로 느꼈다. 부모 집에서 부모가 마련해주는 밥을 먹으며 부모의 돈으로 옷을 사고, 친구를 만나고, 어딘가를 놀러 다닐 때는 몰랐던 '생계'라는 세계가 있었다. 물론 나도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건 아르바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내가 버는 돈이 곧 내 집이었고, 내 밥이었고, 내 이동수단이자 인간관계였다. 직장을 그만두어도 월세는 꼬박꼬박 나갔다. 월세 이외에도 전기세와 수도세, 관리비 등이 따라붙었고 딱히 뭘 사거나 하지 않아도 카드값이 달마다 따박따박 내 월급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서울 살이에 적응을 못해 결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나도 밤마다 숱하게 집으로 돌아갈까를 고민했다. 나의 노동이 곧 나의 삶이 되는 세계, 내가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세계. 나는 그 세계로 한 발 들어왔다.



돈 벌기의 미학


'돈이 발목을 잡는다'는 말에는 '돈만 아니면 훨훨 자유롭게 날아갈 텐데.'라는 이 담겨있다. 다음 달 카드값만 아니면, 대출 이자만 아니면, 월세만 아니면, 친구 결혼식 부조금만 아니면 그러면 나는 좀 자유롭게 살 텐데. 하루 종일 영화관에 틀어박혀서 영화도 보고,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책도 좀 읽고, 줄곧 배우고 싶었던 악기도 배우고, 이태원의 핫하다는 맛집도 가고, 눈독 들이던 그릇도 살 텐데. 그렇지만 내가 부르짖는 '자유'라는 걸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자유에도 엄연히 돈이 필요하다. 아니, 돈이 있어서 비로소 자유로운 것이다. 젊을 때는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고, 늙어서는 돈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는 그 명언이 뇌리를 스친다.  


누구나 돈을 쉽게 벌기를 원하고, 돈 벌기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책들이 서점에 넘쳐난다. 나몇 해전인가 돈 벌기에 관한 일본의 베스트셀러 한 권을 읽었는데, 아직도 내용이 또렷이 기억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1) 유산이 있다면 사양하지 말고 받아라. 잘 받는 것도 부자의 태도다.

2) 수입 중 일부는 부동산에 투자해라.


맥이 빠지다 못해 화가 났다. 상속받을 유산이 있는데 사양할 입장이라면 애당초 그런 책을 왜 보겠는가. 게다가 일부는 부동산에 투자하라니.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의 21세기 버전을 여기서 만나는구나.


아무튼 생계를 위한 돈 벌기는 계속되어야 하고, 돈 벌기에 대한 통렬한 고백도 동서양 곳곳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들려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우리의 속담도 있고, 샹송 중에 <je ne veux pas travailler>(나는 일하기 싫어요)라는 곡도 있다. 잔잔한 포크송을 주로 쓰는 기타 선생님이 새로 쓴 곡이라며 '뿌우빰빰 쿵짝쿵짝 촤르르르'한 곡을 들려줬을 때, 내 의문의 눈동자에 대한 그의 대답은 '아, 저도 먹고살아야죠.'였다.


연애도 안 해보고 결혼도 안 해보고 애도 안 키워보고 회사 역시 안 다녀봤지만, 인생사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는 모 스님의 책에도 역시 '회사 다니기 싫어요'라는 누군가의 푸념이 담겨있다. 스님은 '회사를 학교라고 생각해라. 일도 배우고 돈도 받으니 얼마나 좋냐.'라고 써놓았다. 회사 생활이 무척 힘들었던 어느 날, 서점으로 달려가 읽은 구절이지만 위로가 얼마나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출퇴근 시간을 합치면 하루의 절반을 돈 벌기에 투자하는 셈인데, 나머지 절반이 돈 벌기에 지친 심신을 휴식할 목적으로 쓰인다고 생각하면 돈 벌기가 꽤나 허무해진다. 애를 낳은 친구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애 봐줄 이모님 월급을 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해하면서도 묘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산수를 하고 있다. 동기 중에 드물게 '군대가 너무 좋았다. 다시 한번 가고 싶다'라는 애들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직장인 중에서도 '돈 버는 게 제일 쉬웠어요.' '주말이면 회사가 그리워요.'라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성향과 처한 상황이 다를 것이니.


나는 아쉽게도 하루의 절반을 돈 벌기에 투자하고, 나머지 절반을 돈 벌기에 지친 고단한 심신을 달래는데 쓰고 있는 직장인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과연 내일이 정말 월요일일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노름으로 논을 족히 몇 마지기 날려먹었다는, 얼굴도 본적 없는 할아버지를 괜히 원망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일하는 걸 싫어하면서 꾸준히 회사를 다니고 있다니 대단하다!'라는, 감탄인지 조롱인지 모를 평가를 가끔 듣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돈 벌기가 꼭 역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돈 벌기는 중력처럼 내가 현실에 발붙일 수 있게 '내 발목을' 잡아줬다. 꿈꾸지 않게 된다는 말은 좀 비관적이니, 조금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헛꿈'을 꾸지 않게 해 줬다. 저축 같은 건 꿈에도 모르고 살던 내가 대출이 생기면서부터는 저축을 하게 됐고(저축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내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회사를 다니며 인생살이에 득이 되는 기술도 많이 배웠다. 싫은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 나를 변호하는 법, 진짜 좋은 친구를 가려내는 법 등을 얻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출근하며 성실해졌고, 업무이니 싫든 좋든 매일 글을 쓰면서 글이 조금씩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하기 싫은 일이니 미뤄봤자 같을 거라는 생각에 미루는 습관이 싹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모 스님의 '회사는 학교' 설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소제목을 '돈 벌기의 미학'이라고 우아하게 붙여봤지만, 사실 돈 벌기에 미학이 어딨겠나. 돈 벌기 뿐만 아니라 뭐든 그렇다. 허무한 이야기지만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치타가 전속력으로 토끼를 쫓으면서 '아, 나는 지금 생을 위한 한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나 멋지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배고프니까 쫓는다. 인간은 치타보다는 고차원적이지 않느냐고? 그건 각자의 해석에 맡기련다. 나도 필요하니까 돈을 번다. 그 과정이 나에게 좀 더 순하고 이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토끼는 잘 쫓아도 풀 뜯기는 어려운 치타처럼, 나도 나의 성향에 좀 더 맞는 일을 통해 좀 더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돈을 벌 뿐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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