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니즈

아이스케키와 죽순은 아,어쩌나

by 꽃반지

"악! 악!"

처음엔 누군가 악을 쓰는 줄 알았다. 아직 취하기엔 이른 금요일 저녁이지만, 이미 충분히 취해버린 누군가도 있을 테니까. 집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데 악을 쓰는 남자의 쉰 목소리가 쉬지 않고 내 걸음을 쫓아왔다. '뭐지?'


어둑어둑한 공기 사이에 뿌리박은 소리의 근원지를 눈으로 따라가니 비칠거리며 서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있었다.

"악! 악! 아이스케키!"

나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니 목에 색이 바랜 푸른색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필 편의점 두 개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도로 중간에 버티고 서서. 아마, 살면서 최초로 본 아이스케키 통인 데다 수십 가지 아이스크림을 1+1, 2+1으로 골라먹을 수 있는 편의점의 시대에 아이스케키... 라니. 하나도 팔리지 않았을 아이스케키 통과 함께 남자의 악쓰는 소리가 점차 흐려질 때까지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번잡한 출근길 아침, 서울이라면 어느 전철역이든 출근하는 사람들로 꽤나 붐빈다. 서울에 올라와 2호선을 타고 출근한 첫날, 지하철 입구에서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아 정말로 사고가 난 줄 알았으니까. 내가 사는 동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빠른 걸음과 지친 표정으로 서둘러 통과하는 지하철 역 입구 한편, 소쿠리 몇 개에 죽순을 꺼내 놓고는 아침부터 쭈그려 앉은 할머니 한 분이 있다. 힐끔 눈길만 한번 주고 빠르게 그 곁을 스쳐 지하로 성큼성큼 내려가면서 '죽순이라니. 차라리 김밥을 파는 게 훨씬 나을 텐데.'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 생각도 내 걸음을 타고 빠르게 사라져 버렸지만.


지하철 역 입구 한편이 할머니의 직장이라도 되는 양, 얼마 전부터 등장한 할머니는 쉬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켰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할머니를 스치면서 하는 잠깐 하는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죽순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수요 창출이라...


그날도 어김없이 회의가 있었다. 몇 번째 회의 인지도 모르겠지만. 애꿎은 사원들이 멀뚱멀뚱 앉아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마주치면 인사만 까딱하는 상사가 내 이름을 콕 짚어 부르며 물었다. (아니, 내 이름을 알다니!)

"수요 창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눈이 이미 반쯤 풀린 채로 허공을 향해 있는 걸 들켰는지, 수업시간에 졸다 깬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지만 프로 직장인답게 놀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들켰을 수도 있)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야 합니다."

상사가 반쯤 풀린 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한 답변입니다." 예, 그렇다면 저는 이만 다시 꿈나라로...


'연애를 잘하려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 하지 말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좀 더 분명하게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좋아하는 것의 카테고리는 실은 본인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고 애매모호하며 두루뭉술하고 시시때때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싫어하는 것은 대개 잘 벼른 칼날처럼 정확하고 뾰족한 법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라고 하면 머릿속 목록을 넘기느라 3초 정도 침묵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음식을 말하라고 하면 1초 만에 즉각 대답할 수 있다. 그래, 수요 창출을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분명하게 고객의 니즈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무의식의 깊은 심연에 잠겨 "고객의 니즈"라는 빤한 정답을 날리는 동시에, 내 무의식에 동그란 파문이 일었다. 바로 아이스케키와 죽순이 남긴 파문이었다. 고객의 니즈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지하철 역 할머니와, 고객의 니즈는 알고 있지만 경쟁이 너무 치열해 결국 아이스케키 하나도 팔지 못했을 그 아저씨는 어떻게 수요 창출을 해야 하는 걸까.

출처 : 네이버

진화론 중에 '자연도태'라는 말이 있다.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는 진화과정. 영어로는 좀 더 살벌하게 'natural selection'. 자연은 필요한 것만 취한다는 뜻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체로 걸러진 쭉정이처럼 가차 없이 버려진다. 자연엔 동정이 없다. 이게 자연의 법칙이고,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진화와 역사는 그렇게 움직여왔다. 적응하지 못한 자는 버려진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사라진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기에, 모두 돈을 위해 경쟁한다. 수요 창출을 위해 목에 아이스케키 통을 둘러메고 누군가 밖으로 나왔고, 누군가는 이 더운 여름에 새벽부터 죽순을 삶아 지하철 역 앞에 쭈그려 앉았다. 고객의 니즈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들은, 그렇다면 냉혹한 자연의 법칙대로 도태될 일만 남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스케키와 죽순은 더이상 진화의 조심이 없어 보인다.


아이스케키는 이미 너무나 세련된 자본과 마케팅에 의해 아이스크림으로 진화한 지 오래고, 질소 아이스크림이니 솜사탕 아이스크림이니 하면서 고객 본인 조차 몰랐던 잠재 니즈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투 중이다. 죽순은 또 어떻고. 얼마 전에 배운 죽순 요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할머니가 아침마다 소쿠리에 담아놓은 게 죽순인줄도 몰랐을 텐데. 출근길에 걸음을 서두르는 직장인들 가운데 몇 명이 할머니의 바구니에 눈길을 줄 것이며, 또 눈길을 줬다한들 그 들중 몇 명이나 죽순을 알아볼까. 나처럼 죽순을 알아본들 그 또 어쩔 것이냐. 이 여름에 웬 죽순인가, 하고 총총 사라질 뿐이지.


아이스케키와 죽순과 고객의 니즈 사이에 서있는 나는, 앞으로도 아이스케키와 죽순을 종종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시간은 쉼 없이 우리 등을 떠밀고, 자연도태는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나는 아마 곧 길거리에서 그들을 만날 수 없겠지. 수요 창출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애당초 고객의 니즈따위는 알 필요도 없는, 일주일치 피로가 쌓인 금요일 밤에 편의점 앞에서 목이 터져라 아이스케키를 팔지도 않고, 아침부터 지하철 역 앞에 쭈그려 앉을 필요도 없고,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하고 바쁜 걸음으로 돈을 벌러 뛰어다니는 아침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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