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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l 26. 2019

캐리어가 꼭 필요하세요?

당신과의 첫 여행


변태는 아니지만 하얀 맨 몸에 까만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전신 거울 앞에 서니 기분이 묘다. 위탁 수화물을 옵션으로 넣지 않은 항공권이라 7kg 이내의 기내 수화물 규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배낭 무게를 따로 한번 잰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낭을 메고 다시 무게를 잰 뒤 내 몸무게를 뺐다. 4.7kg.


떠나기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캐리어 없는 여행이니 최소한의 짐만 챙길 것'을 통보했다. 돌아온 대답은 '절대 NO!'. 엄마는 여행을 어떻게 캐리어 없이 가느냐며 가져가겠다고 딱 잘라 대답했다. 부모님과 여행을 다녀온 친구도 '컨트롤 불가한 영역은 그냥 맞춰드리는 게 낫다'는 입장. 하는 수 없이 항공권에 수화물 옵션을 추가하려는데, 여행지 내에서 비행기를 또 한 번 타야 하는 데다 이래저래 번거로운 게 많아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캐리어가 꼭 필요하세요?"




다음은 다음으로


유학시절, 엄마가 나를 보러 온 것 말고는 엄마와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오토바이 타고 어디를 갔네, 정말 잊지 못할 풍경을 보았네... 감흥에 젖어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


엄마와 함께 시원하게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 여행기를 펴낸 태원준 작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엔 가족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우리 가족만 빼고 모두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보달까. 우리 가족이 어떤 가족이던가. 가족여행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다 같이 모여 밥 먹는 날은 가족 구성원 네 명중 세 명의 생일-네, 홀로 겨울에 동떨어진 한 명이 바로 저입니다-이 몰려있는 8월의 어느 하루랄까. 좀처럼 같이 뭔가를 해본 적이 없는 가족.


부러움이 가득 담긴 엄마의 한결같은 대답에 "응, 다음에 같이 가자."하고 나도 한결같은 대답으로 응수했지만, 이미 우 모두 알고 있다. 다음은 늘 다음으로 미뤄지기만 할 뿐이라는 걸. 엄마와 코드도 잘 맞고 친구처럼 잘 지내지만, 왠지 엄마와의 여행은 자꾸만 미뤄졌다. 시간 좀 내볼까 하면 엄마가 이미 친구들과 여행 계획이 있거나, "유럽 아니면 별로."라며 회사원의 짧은 휴가와 빠듯한 통장을 가뿐히 무시한다거나, "어디든 좋지."라는 애매한 말로 애매함을 가중시킬 뿐.


지금은 치앙마이의 침대에 누워 빗소리와 곁에 누운 엄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이런 날이 진짜 올 줄은 몰랐다.



연남동 가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항공권을 끊은 게 지난 오월이다.  아니면 진짜 못 간다 싶어 국수 면발 삼키듯이 후루룩 끊어버렸다. 그 뒤로 한 달 정도 지나 숙소 세 곳까지 겨우 예약을 마쳤다. 다시 한 달이 지나 "어, 이거 진짜 가야 되는 거야?" 하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 나를 사로잡은 데다, 회사에서 몸담고 있던 팀이 여행 일주일 전 갑자기 물거품처럼 해체되면서 더 이상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눈치 보며 퇴근 후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항공권 변경이 불가해 자정 넘어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출발일이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구석의 부담감이 더해갔다. 혼자라면 들춰볼일 없는 여행서적도 두어 권 읽고, 영화보기 전 스포를 당하는 것 같은 박탈감에 피해왔던 블로그 후기도 꼼꼼히 챙겼다. 계획을 워낙 싫어해 처음엔 이 부담감이 일정 때문인 줄 알았는데, 대략적인 일정이 나오고 나서도 마음의 부담감이 여전했다.


그녀에게 '완벽한 여행'을 선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안에 엄마와 떠나는 여행이란 '나도 쉬고 너도 쉬고'가 아니라 '내가 못 쉬는 만큼 너는 쉬고'라는 대전제가 깔려있었다. 매끄러운 진행과 유려한 말솜씨를 겸비한, '여행계의 유재석'을 나도 모르게 꿈꾸고 있었던걸 지도. 출발 몇 시간 전까지 서점 한구석에서 여행서적을 뒤적거리며 다음날 시험을 준비하는 기분으로 벼락치기를 하다 문득 이러지 말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좀 쉬고 싶었다. 가볍게 연남동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새로운 카페와 빵집을 발견하는 기쁨을 아는 소박한 마음의 표정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책을 덮고 서점을 나왔다.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와 서울역에서 만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으니 어느 틈에 자정을 훌쩍 넘겼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엄마 표정을 살폈더니 웬걸, 그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안 피곤하세요?"

"난 지금 집에 가라고 해도 충분해. 너랑 함께니까 너무 좋아."



머쓱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나. 새벽 네시에 퉁퉁부은 얼굴로 방콕에 도착해서도, 치앙마이 공항에서 택시를 탈 때도, 동네 작은 식당에서 주스를 마실 때도 그녀의 '너무 좋아'는 계속되었다. 한 시간에 열 번도 넘게 말한 적도 있어서 진정성이 살짝 의심되기도 했지만.

"뭐가 그렇게 좋아?"

"해야 될 일이 없어서 너무 좋아. 밥 안 해도 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고, 나 찾는 사람도 없고."


엄마도 그저 쉬고 싶었구나. 나처럼 일상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나오는 시간이 필요했구나. 일정표빼곡 채운 무수한 관광지 대신, 우리는 낮잠을 자고 라임 잎을 우려 차를 마시고 우거진 나무 아래 앉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함께 과일을 나눠먹고 널어둔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지켜보았다.




4.7kg의 무게도 많다. 가방을 끌러보니 이건 필요 없었겠다 싶은 물건이 잔뜩이다.

"캐리어가 꼭 필요하세요?"

떠나오기 전 엄마에게 했던 질문은 실은 내게 스스로 건네야 할 질문이 아니었을까. 뭔가를 잔뜩 넣은 마음의 캐리어를 질질 끌고 힘들어하던 건 정작 나였는데.


엄마는 산뜻한 배낭 하나만을 등에 매고 여행에 올랐다. 작은 것의 기쁨을 아는 소박한 마음의 표정으로 늘 나에게 "너와 함께면 다 좋아!"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좋아요.

캐리어 따위는 어찌 됐든 좋아요.

(코 고는 소리만 빼고.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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