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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05. 2019

그대의 눈동자와 허벅지 실핏줄

휴가 같은 그대여

휴가가 도루묵이라는 얘기는 아니겠지요?


땀을 뚝뚝 흘리며 서울시립미술관을 향해 걷다 '휴가'라고 유리벽에 종이를 써붙인 가게 앞에 잠깐 멈춰 섰습니다. 아무런 종이를 가득 메운 글씨에서 호쾌함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매직이 잘 나오지 않아 처음 시작할 때 두어 번 북북 그은 흔적이 보이고, 8월 1일과 4일 사이에는 시원하게 넘실대는 파도마저 보입니다. 에라이, 이렇게 더운 여름에 종일 불 앞에 서서 요리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휴가나 다녀옵시다! 하고 호방한 성격의 사장님이 종이 하나를 탁 꺼내 매직으로 북북 쓴 다음 가게 문을 홀연히 닫고 떠나는 모습을 잠깐 상상했습니다.


불볕더위를 마다하고 미술관을 찾아갈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은 아니지만, 땀을 뚝뚝 흘리며 마침내 찾은 미술관은 오늘따라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입장하는 데만도 40분가량 줄을 서야 했으니까요. 왜냐면 오늘은 데이비드 호크니 전 마지막 날이고,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 줄곧 미루다가 결국 처럼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빼곡했습니다.



내 눈에만 보여요 


더위에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데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는 고프고, 창자처럼 굽이굽이 구불구불한 줄까지 서고 나니 막상 전시회장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에도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어 작품보다는 사람들 뒤통수 구경만 실컷 했죠. 이럴 때 전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인기 작품만 본다

2) 비인기 작품만 본다


기껏 애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인기 작품은 보고 가자!라는 생각이라면 1번, 인기고 뭐고 사람에 치이기 싫으니 차라리 단 한 점이라도 조용히 보고 가겠다 싶으면 2번을 눌러주세요. 삐-

작가의 대표작 몇 점을 알고 있기도 했고, 영국에서 물 건너온 전시인만큼 가열차게 1번을 눌렀으나 뒤통수 부대에 밀려 강제로 2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밀려난 그곳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은 스케치가 한 점 있었어요. 한 남자를 그린 스케치인데 얼핏 보면 성급하게 그린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남자의 섬세한 모든 것이 다 담겨있는.


좌우 크기가 묘하게 다른 남자의 눈동자와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실핏줄, 허벅지 안쪽의 거친 살결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러니까 그 사람을 자세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만 겨우 보이는 그런 것들. 나도 사랑 같은 거 해봤으니까, 그래서 이 그림을 보고 느꼈어요. 사랑하네. 작가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그 후에 알았습니다.



휴가 같던 그대가 일상이 되기까지

처음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러니까 굳이 '사랑에 빠진다'라는 거창하고 남루한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런 거 있잖아요. 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달라진 기분. 내 일상이 갑자기 휴가가 된 기분. 지옥 같던 출근길도 조금은 견딜만하고, 상사의 맥락 없는 잔소리에 기분이 덜 나쁘고, 매일 먹는 밥이 왠지 좀 맛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지금은 헤어졌지만, 지난 연애를 하면서 처음으로 '이 사람이랑은 결혼이란 걸 해봐도 되겠다, 함께 재미있게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나는 애도 필요 없고 홀로 고요히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니, 혼자만의 시공간을 자주 박탈당하고 관계와 책임과 의무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양껏 버무린 결혼 같은 거,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늘 생각해왔거든요. 잘 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이도 분명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랑은 자꾸 그 뒤를 같이 그려보고 싶은 거예요. 만남 초반에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데, 이 사람이 저랑 같은 버스에서 내리더라고요. 집이 서로 반대방향인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약속 장소로 오다가 중간쯤에 저를 발견하고는 '이 사람이 어떻게 버스를 타나, 오면서 뭘 하나' 이런 게 궁금했대요. 그래서 몰래 같은 버스를 따라 탔는데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어쩜 그렇게 모르냐고 절 놀렸죠. 저도 그런 적이 있는데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는 숨어 있었던 적이 있거든요. 나를 기다리면서 뭘 하는지 궁금했는데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는 소리 내서 따라 읽더라고요. 그때 마음 어디가 괜히 찡했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모습이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자세히 궁금해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모습들. 상대방의 그런 모습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마일리지가 쌓이는 것처럼 뿌듯했어요. 그 마일리지만큼 우리 사랑은 견고하다고 굳게 믿었고요.


아무리 황홀한 휴가라도 하염없이 길어지면 일상이 됩니다. 처음엔 마냥 새롭고 반짝이던 것들이 빛을 잃으면서 빠르게 시들어가요. 휴가 같던 연애가 어느덧 끝나지 않는 일상이 된 지 오래. 언젠가부터 우리는 손을 놓고 걸었고, 만나기 위해 굳이 시간을 내지 않았고,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대신 각자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습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려 넣고 있었어요. 결국 여기까진가? 내가 먼저 이야기해야 하나? 언제까지 모른 척 계속할 수 있을까?


휴가의 끝에는 돌아올 일상이 있지만, 이미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사랑의 끝에는 그저 이빨이 빠진 것처럼, 빈자리가 선명한 일상이 있을 뿐. 그저 살아가야죠. 도망갈 수도 저버릴 수도 없는 나의 덤덤한 일상이니. 이별 후에 저는 걷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치고, 자려고 누워서는 이불이 다 젖도록 밤새 울었고,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보려고 미친 듯이 뭔가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작가가 사랑했던 저 남자와의 끝을 굳이 그려보진 않았어요. 지금은 한 점의 스케치처럼 '휴가'라고 북북 쓴 글씨만 남긴 채 홀연히, 호쾌하게 떠날 수 있는 휴가기간이니까. 그림 속에서는 크기가 묘하게 다른 눈동자와 허벅지의 가느다란 실핏줄에 기대 언제까지고 쉴 수 있으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달콤한 휴가가 계속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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