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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19. 2019

요즘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기술만 필요한 건 아니니까

조심할게 박자만은 아닌 거 같아요


"앞으로 쌤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아, 쌤 왜요."

"이제 기타 안 배우실 거잖아요. 형이라고 부르세요, 형."


잠깐 기타 학원을 쉰다고 통보했지만, 기타 선생님은 '잠깐' 속에 담긴 '영원'을 눈치챘는지 앞으로 쌤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쐐기를 박았다. 현대판 홍길동도 아니고 당분간 수강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쌤을 쌤이라고 부르지 못하다니. (그렇다고 남의 성별을 바꾸는 건 또 뭡니까.)



설마 캐논 정도는 칠 수 있겠죠


이 동네에 이사 온 지도 벌써 2년 -재계약의 시점이 다가오는군요-이 다 되어간다. 온몸과 마음으로 아끼며 사랑하던 연남동을 눈물로 떠나, 장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은 생소한 동네에 안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딱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피아노 학원이었다. 실은 뭐 '착붙'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 채 1분이 안 걸린다. '오, 피아노나 다시 시작해볼까?'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가 피아노를 꽤 오래 치고 있었는데, 가끔 내게 연주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할 때면 '그러니까 악기는 조기교육이지.' 하고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가기 싫다는 내 등을 후드러패며 피아노 학원에 보낸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도 뜨거운 김처럼 덩달아 훅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나는 조기교육의 수혜자이니, 내 앞에 건반만 갖다 주면 간단한 곡쯤이야 열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여 줄 거라는 근거 없는 신뢰가 있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근거 없는 신뢰입니다.)


그렇지만 그 학원은 아이들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어 평일에만 문을 열었고, 원장님도 역시 퇴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해버리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도통 배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학원을 알아볼 만큼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지극했던 것도 아니고, 그땐 기타를 배우고 있기도 했으니까. 마침 이번에 회사를 쉬게 되면서 기타도 잠깐 쉬기로 마음먹었는데, 늘 닫혀 있던 피아노 학원이 부릅뜬 눈처럼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걸 보니, 놀랍고 기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등록하러 왔는데요."하고 (작게) 외쳐버렸다.


작고 낡은 피아노 학원이지만, 원래 고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 법.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집 구하러 다닐 때마다 부동산 업자들에게 주야장천 귀 따갑게 듣던 저 질문이 그날처럼 달게 들릴 수가 없었다. 제가 말이죠, 음 그러니까 체르니도 좀 알고, 음... 음. 그때 마침 머릿속에 떠오르는 멜로디.

"저... 캐논 치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어릴 때 좀 쳤다는 나의 말과 어릴 때 실력이 아직 남아있을 거라는 나의 근거 없는 믿음과 캐논을 치고 싶다는 나의 확고한 의지를 종합해, 마침 편곡된 캐논 악보가 있다며 내게 건네주셨다.

"이 정도는 괜찮으시죠?"

"..."

선생님이 안겨준 미취학 아동용 체르니 100번 교재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낮에 체르니 100번을 내팽개쳐놓고 벌렁 누워있으니 인생의 미취학자가 된 느낌이 잠시 들었다. 참고로 내가 치고 있는 기타 교재도 미취학 아동용이다.



왜 그때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남자아이는 태권도, 여자아이는 피아노로 으레 양분화되던 그때 그 시절, 나 역시 엄마 등쌀에 피아노 학원을 꽤 오래 다녔다. "열 번 연습해."하고 선생님이 악보 빈 공간에 그려준 포도알 열개를 다 채워야 집에 갈 수 있는. 이번에 피아노를 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악보를 볼 줄 모른다는 거였다. 아니, 악보를 못 보는데 어떻게 몇 년이나 피아노를 치지? 음 하나하나를 건반으로 짚진 못하는데, 어릴 때 쳤던 악보가 나오면 그걸 그대로 손가락이 쳤다. 아니, 내 손가락이 이 어려운 걸 해냅니다... 가 아니라 완전 잘 못 배운 것. 오로지 포도송이를 다 채우고 집에 빨리 가기 위해 음이 아니라 형태를 외워버린 거다. 멋있는 곡을 치고 싶다고 주장하는 내게 기타 선생님이 "코드 외워서 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했던 말과 같은 맥락. '도'는 모르지만 '도솔 미솔  도라 파라'는 너끈하게 치는 건반 위의 내 손가락을 보고 피아노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 그래서 어릴 때 제대로 배워야 하는 거예요." 시온 피아노 원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나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흔히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특히 악기는 어릴 때 배울수록 좋다고 하는데, 몇 년 동안 포도송이 빨리 색칠하기만 배워놓고 이제 와서 제대로 배우려니 좀이 쑤신다. 피아노 학원 안 간다고 날아오는 신라면 맛 등짝 스매싱도 없고, 나의 리사이틀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도 없는데, 왜 나는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있을까. 선생님이 첫날 내게 건네준 캐논 악보가 체르니 100번 사이에 꽂혀있다. 이러다가 캐논인지 개놈인지 한번 쳐보지도 못하고 끝날 것만 같아서 한숨만 푹. 내 또래의 피아노 선생님이 "한 번에 되는 건 절대 없어요. 눈으로 악보 많이 보고 귀로도 많이 들으세요. 그게 다 공부예요."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한다.


요즘 나의 삶이 참 단순하다. 물론 회사 다닐 때도 단순하긴 했다. 회사를 다닐 때가 출근-근무-퇴근, 음 하나하나를 읽지 못하고 덩어리째 외워버린 악보 같은 사이클이라면, 지금은 비로소 오선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음 하나하나를 뜯어가며 알아가는 섬세한 기쁨에 주목하고 있다. 가끔 집에서 기타도 뜯는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기타 선율이 언젠가부터 와 닿지 않았는데, 그 무렵 꽤나 지쳐있어서 그랬구나 싶다. 왜 모두 빨리빨리를 부르짖으면서, 그렇게나 빨리 하려고 안달이 나 있으면서 또 한 번에 잘하기를 바라는 걸까. 빨리 하면 당연히 허술할 텐데, 빨리하면서도 잘하는 게 어째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어른들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음을 다 뭉개버리고 악보만 빨리 보는 못된 습관을 배웠는데,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그런 못된 습관들로 물들어 있는 것 같은데.


회사를 고작 한 달 쉬었는데 키보드 위에 올린 두 손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묘하게 버벅거린다.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먹고는 기술로부터 슬그머니 멀어진 것 같다. 물론 '잠깐'이겠지만, 이 잠깐을 영원으로 만드는 방법 어디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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