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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6. 2019

카페를 구걸합니다

어디에서 쓰시나요


정확히 집에서 나온 지 45분째, 카페를 찾아 헤매다 겨우 앉았다.



낮이냐 밤이냐, 안이냐 밖이냐

버지니아 울프 언니가 그랬다. "여자는 글 쓰려면 돈이랑 자기 방이 필요해."라고. 그게 꼭 여자뿐이겠나만. 직업이든 취미든 어쨌든 글을 쓰려고 하면 (돈과 바꿀 수 있는, 그러니까 돈을 안 벌어도 되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답하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크게 두 가지다. 언제 쓰세요? 그리고 어디서 쓰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 쓰는 일에 대해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아무래도 TV의 영향이 큰 거 같습니다만- 밤이 이슥할 때야 글을 쓰는 줄 지레짐작한다. 물론 밤에 쓰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굉장한 아침형 인간으로 늘 알람보다 눈을 먼저 번쩍 뜬다. 제일 좋은 건 눈뜨자마자 바로 책상으로 기어가서 잠결에 노트북 뚜껑을 열어젖히는 거다. 노트북 전원이 들어옴과 동시에 뇌에도 뿅 하고 불이 들어와서, 완전히 몰입해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베스트. 그렇게 다 잠시 노트북을 덮고 점심을 먹고는 잠깐 산책도 하고, 그러다가 해가 지면 그날의 글쓰기는 마무리하는 거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글쓰기는 말 그래도 이상적인 글쓰기 일 뿐이지만, 몇 번만 시도해보면 제일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을 금세 찾을 수 있다. 아니면 일정한 시간에 계속 글 쓰는 훈련을 해서 시간을 몸으로 습득할 수도 있다.


내게 문제는 '언제'가 아니고 '어디에서'다. 낮이냐 밤이냐, 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닌데 안이냐 밖이냐, 는 그렇게 어렵다. 공간에 성격을 확실하게 부여하는 편이라 한 공간이 여러 개의 성격을 띠는걸 못 견딘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 식탁 위에 놓여있는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그렇게나 못 견뎌했던 것처럼. 시험을 앞두고도 절대 집에서 공부를 안 했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휴식은 집에서 하는 거니까. 나도 버지니아 언니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있긴 있는데, 이게 원룸이면 좀 슬퍼진다. 자기만의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글까지 써야 되니까. 이게 싫으면 글을 밖에 나가서 써야 하는데, 다들 잘 가는 카페를 못 가는 이유가 있다. 그것도 몇 가지나.



카페를 싫어합니다

1. 씻는 게 귀찮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늘 카페에서 책을 읽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하루 중 두세 시간이라도 꼭 카페에서 보내는 편인데, 난 그게 되게 신기했다. 그렇게 귀찮은걸 어떻게 할까? (저는 집순이입니다...) 일단 카페에, 그러니까 일단 집 밖으로 나가려면 씻어야 한다. 친구와 나는 둘 다 머리가 긴 편인데, 머리 긴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려면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는 공정이 필요하다. 최소 30분 소요. 머리만 감고 말리면 되나. 신고당하지 않으려면 옷도 입고 나가야 한다. 최소 추리닝을 입고 나간다고 해도 어쨌든 집 앞에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복장보다는 좀 더 갖춰 입는다. 친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화장하는걸 되게 귀찮아하고 싫어한다. 잘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모르는 사람 10명 이상' 일 경우에 화장을 한다는 내 인생 철칙- 그래서 회사에 다닐 때도 미팅이 있는 날만 화장을 했다-을 따르면 화장도 좀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카페에 나가기 위한 준비 과정에 한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친구는 '집에만 있으면 축축 쳐지니까 한 시간을 준비해서 나간다'는 입장이고, 나는 '그 시간에 차라리 좀 더 뭉기적 거리자'는 입장이다.


2. 커피를 못 마셔서

그 어려운 머리 감고 말리기와 화장하기 관문을 통과하고, 노트북까지 둘러메고 나갈 마음을 겨우 냈다면 이제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카페 고르기.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적당한 곳에서 "아아 한잔요!" 부르짖으면 되겠지만, 나는 커피를 못 마신다. 살면서 마신 커피의 총량이 채 한잔이 안된다. 카페인 민감도가 성층권을 뚫고 나갈 수준인데, 얼마 전 녹차로 유명한 오*록에서 신나게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세 달을 참다가 먹은 건데. 녹차 라테도, 녹차 아이스크림도 정말 좋아하는데 담배 끊는 마음으로 꾹 참다 참다 몇 달 만에 한잔 신나게 마시면, 최소 하루를 그냥 날리게 된다. 이제 내 인생에 녹차는 없는 걸로. (녹차도 못 마시는 인생!) 커피를 못 마시니 자연히 논 커피 음료를 기웃거리게 되는데, 커피 잘하면서 논 커피까지 잘하는 카페가 그리 많지 않다.


3. 조용한 게 좋아서

영화는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된다는 입장이지만, 영화관 가는걸 너무 힘들어한다. 저렇게 슬픈 장면에서 꼭 팝콘을 와작와작 씹고 싶은지, 공공장소에서는 핸드폰 벨소리가 무음이라고 언제까지 알려줘야 하는 건지... 내가 눈물을 삼키는 동안 옆 사람이 팝콘을 삼키는 것 까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조용할 땐 조용하고 싶다. 문제는 카페에서도 조용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건데, 카페가 애당초 집중을 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인다. 여기에 카페에 흐르는 음악이 철저히 취향을 거스르는 경우에는 글쓰기는 틀렸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너무 좁은 곳은 옆사람이 짝꿍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괜히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옆 사람에게 보일까 봐 혼자 신경 쓴다.


4. 뷰가 중요해서

'사는 공간이 비루하니 카페를 찾게 된다'는 문장을 어디에서 읽은 적 있다. 꼭 공간의 비루함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집과 다른 공간은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숨통이다. 내가 사는 공간은 너무 슬프게도 햇살이 잘 안 든다. 집을 구할 때도 이 점이 제일 맘에 걸렸는데,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1) 2) 3)의 이유 때문에 대부분 방에서 노트북 하나 켜놓고 글을 쓰지만, 밖에 나가서 써볼까 하고 마음이 꼼질거리는 날은 날씨가 무지하게 좋다. 겨울엔 어차피 나가봤자 춥고 음울하니 집에서 쓰는 게 억울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좋은 계절에 집에 있으면 괜히 일어났다 앉았다 하다가 글도 못쓰고 날씨도 놓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결국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감아야겠다고 결심하는데만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후. 햇살이 고파 밖으로 나온 것이니 햇살이 잘 드는 자리를 선호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통유리 벽이거나 탁 트인 창이 있는 카페를 기웃거리지만, 꾸물거리다 밖으로 나오면 그런 자리는 이미 다 주인이 있다.


5. 이런 거까진 안 바랬는데

최근에 발견한 카페, 심지어 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 중에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고

-통유리 벽이라 햇살이 환하게 잘 들고

-커피 외 음료도 수준급이고 (못 참고 또 녹차라테를 마셨다가...)

-흐르는 음악까지 완벽한

곳을 찾았다. 게다가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테이블이 널찍하고 의자 높이도 적당해 오래 앉아있어도 자세가 되게 편했다. 오늘도 당연히 여기를 가고 싶었지만, 거기를 가지 않고 45분 동안이나 카페 몇 군데를 뒤지고 다닌 이유는 '두세 시간 앉아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 때문에 불편해서다. 개인이 하는 작은 카페이니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인다. 전화를 걸어서 "저 거기서 글 쓰려는데 두세 시간 앉아 있어도 되나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리고 가게 되면 또 녹차라테를 마실 것 같아서... 테이블과 의자는 옵션에 있지도 않았는데, 저렇게까지 구색이 잘 갖춰진 카페를 찾게 되면 주인분에게 참 고맙다.


6. 배가 자주 고파서

그리고 이건 카페에서 글을 못 쓰는 결정적인 이유인데, 배가 너무 자주 고프다. 쉴 새 없이 먹는 편인데, 카페에서 계속 뭔가를 먹느니 차라리 식당에서 노트북을 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집에서는 계속 뭔가를 먹거나 마실 수 있으니까 걱정이 없는데, 밖에서 진득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치면 일단 배가 고플까 봐 걱정된다.



으로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올 때는 위의 모든 옵션을 포기한다. 나도 양심이 있다. 소개팅 나갈 때 얼굴도 내 스타일이고 옷태도 좋고 취향도 나랑 비슷한 데다, 마침 읽고 있는 책까지 똑같고 심지어 같은 동네 사는 그런 남자를 꿈꾸지 않는 것처럼, 맘먹고 카페에 갈 때도 똑같다. 그냥 노트북 꽂을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된다. 음료 맛이 별로라도, 배경음악이 요란해도, 우리 집이랑 다름없는 어두컴컴한 자리라도 다 괜찮다. 이런 마음으로 카페 몇 군데를 뒤졌지만 놀랍게도 평일의 한낮인데 모든 카페가 꽉꽉 차있었다. 내 콘센트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니... 다들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온 김에 뭐라도 마시고 갈까 했지만 논 커피 메뉴가 없거나 솔드 아웃. 역 근처의 스타벅스 두 개마저 나를 위한 콘센트 하나를 내주지 않았을 때, 카페를 구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다니는 이 아이러니. 원래는 이 글을 쓸 생각이 아니었지만, 카페 구걸에 성공하면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소설가 분은 "저는 겨울에 글 안 써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하루 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 핸드폰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겨울에는 추워서 못쓴다고. 한 시인 분은 스타벅스를 너무 열심히 가서 쓰다 보니, 점장이 알아보고 이젠 자리까지 맡아준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각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열심히 쓰는 이유가 있겠지. 아, 그나저나 오늘 쓰려고 했던 글은 시작도 못했는데 배가 고프다. 저녁엔 뭐 먹지.




* 가끔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일인가, 생각하지만 세상 살면서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하고 놀랍고 훌륭한 것들에 감탄하다 보면, 그런 것들은 예민하고 섬세한 취향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글쓰기를 위한 방문이 아닌, 카페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뭔가를 마시며 수다 떠는 시간은 너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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