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Oct 09. 2019

각자의 기분은 각자가 책임지는 거야


지난 3월부터 계획된 여행이었다. 나를 포함해 회사 친구 네 명이 괌에 가기로 했다. 괌이라고? 쇼핑의 천국이네, 서핑의 성지네 들어는 봤지만 쇼핑도, 서핑도 딱히 흥미가 없어서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여자애들 너덧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행이 어떤지도 대충 알기 때문에, 그게 싫어 대부분의 여행도 혼자 해왔다. 반년 뒤에나 떠난다는 얘기를 듣고, 3월엔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그래, 가자.



괌에 언제 감?

회사원의 3월에서 10월이라.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출퇴근 때 걸치는 옷이 점점 얇아졌다 다시 두꺼워지는 것 말고는 비슷한 날이 반복될 거였다. 날마다 같은 얼굴을 보고, 늘 해오던 업무를 하고, 점심메뉴를 고민하고, 퇴근 때 잠깐 신나고, 주말엔 돌아올 월요일을 걱정하고 그렇게 흘러갈 시간이었다.


그렇게 흘러가야 할 시간이었는데 그 사이 뜻하지 않게 퇴사했고,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속한 팀이 하루 사이에 해체되었고, 헤어지자는 말을 네트 너머로 주고받던 남녀 복식팀 역시 해체되었다. 넋 놓고 걷다가 아스팔트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엎어져 울었다. 지나가던 남자가 119를 불러주겠다며 나를 흔들었다. 그러게, 모두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계획된 여행일자가 다가올수록 망설여졌다. 수입도 없는 백수가 내키지도 않는 여행을 가야 할까. 길지 않은 여행기간이지만 잠시 중단해야 할 일상의 자잘한 순서들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항공권 반값을 훌쩍 넘는 금액을 취소수수료로 지불할지 말지 며칠 고민하는 사이, 예약해둔 호텔비와 렌터카 대여비가 착착 결재되었고 등 떠밀리듯 그렇게 괌에 가게 되었다. 어쩌면 누가 등을 힘껏 떠밀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내뜻대로 되는 건 좀처럼 없으니, 그냥 떠밀리는 대로 사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행기 출발 네 시간 전이었다. 짐을 서둘러 싸고 집을 나서면 적당할 것 같았다. 다락에서 캐리어를 꺼내는데 갑자기 결항이라는 문자가 왔다. 당장 예약해둔 호텔비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단체 카톡방이 바빠졌다. 다른 비행기를 잡아서 갈까?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탈까? 고민 끝에 다른 비행기를 서둘러 예매하고, 기존 항공권을 취소하고, 호텔에 보낼 항공 지연서를 발급받고, 고심을 거듭하며 조심스레 골라 담은 면세 쇼핑 목록을 눈물로 포기하고, 캐리어를 20분 만에 싸고 집을 나섰다(간략하게 정리되었지만, 꽤 지난했던 과정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새로 예매한 항공편도 결항이라고 했다.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무 소리 없더니 갑자기 지금 말해주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담당 직원이 "인턴이라서 잘 모르겠어요."라며, 난처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은 확실한가 물으니, 태풍 때문에 내일 비행기도 확답하긴 어렵다고 했다. 마침, 일주일 전 넣은 서류전형 탈락이라는 문자가 왔다. 아직 떠나기 전인데 진이 쏙 빠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렇게까지 가야 하나? 갈 수는 있는 건가?



너네는 어쩜 그래?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공항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도 공항 근처에서 하룻밤 자는 걸로 결정하고, 그냥 들어가긴 아쉬워 공항 내 영화관 티켓을 예매했다. 그런데, 왜 나만 곤두서 있는 것 같지. 친구들은 편안해 보였다. 아니, 편안했다. 괌 여행 선호도 순으로 나열하면 내가 제일 끝일 텐데, 표정만 살피면 나야말로 괌에 못가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뭐야, 왜 이렇게 편안한 거야? 유유자적한 친구들 사이에 있으니, 짜증 나고 안달 난 마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너네 성격 진짜 좋다. 나보다 더 짜증 내는 사람 있으면 나도 줄곧 기분 안 좋았을 텐데, 너네가 너무 편하니까 나도 좀 그래."

한 친구가 대답했다.

"같이 짜증 내봤자 뭐해? 각자의 기분은 각자가 책임지는 거야."현답이었다. 


그 뒤로도 내 마음만 요동치는 상황이 몇 차례 더 있었다. 이륙 3분 전인데도 밥 먹으러 가서 나타나지 않는 친구들을 기다릴 땐, 초조해하다가 급기야는 화가 났다. 태풍으로 인한 난기류로 비행기가 요동칠 때는, 티익스프레스 타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엄마아!!!"하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곁에 앉은 친구가 손을 꼭 잡아주기에 "안 무서워?"하고 물었더니 "어차피 안전하게 도착할 건데 뭐."라는 대답을 돌려받았다. 이 친구의 말도 현답이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맘 편한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생사는 노하우일지도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착한 괌은 미친 광풍이 불어, 3월의 우리가 계획한 파란 하늘 산호초 섬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넘쳐나는 데다 거리엔 한글 간판이 쉽게 눈에 띄었다. 내가 두고 온 소중한 일상이 생각났다. 중요한 수업도, 모임도, 만남도 이걸 위해 모두 취소했단 말인가. 씁쓸하고 허탈했다.


여기는 괌이다. 계획한 스노클링도, 기대했던 에메랄드빛 투명 바다도 없다. 하늘은 흐리고, 거리는 한국인 천지고, 식당마다 겨우 하나 있는 채식메뉴는 더럽게 짜다. 친구들의 편안한 얼굴을 보면 나의 성정에 짜증이 불쑥 올라올 때도 있다. 친구 둘은 교대로 운전대를 잡고 하루 종일 운전하는데도 피곤한 내색이 없고, 하늘이 흐리던 말던 예쁜 사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 친구도 있다. 다들 괌이 처음이고, 다들 실망했겠지만 최선을 다해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다.


회사도, 연애도, 여행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예민하고 섬세한 성정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부분 덕분에 순간을 포착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 이번 여행에서 배워야 할 건 인생을 대하는 태도일 텐데, 잘 안되니까 일단 이 친구들 사이에 파묻혀 있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페를 구걸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