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순한 맛

식은 피자의 시간

서늘할 때도 있어요

by 꽃반지


"자, 캐논부터 시작해볼까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에 성인 여자 기준으로 꼭 서른 걸음이 필요한 피아노 학원 문을 열고, 빈 방에 앉아 악보를 펼치자마자, 오래 지핀 뚝배기에 비로소 열이 오르듯 뜨겁게 열이 나기 시작했다. 캐논부터 시작하자는 말에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곤 선생님이 "체르니부터 하는 게 나을까요?"하고 재차 물었고, 내적 갈등으로 잠시 망설이던 나는 "... 저, 갑자기 열이 나서 오늘은 수업을 못 할 것 같은데 어쩌죠"하고, 선생님의 걱정 어린 시선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서른 걸음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난 알고 있다. 악보 보는 연습을 못해서 아픈 거다.


학교 다닐 때도 꼭 그랬다. 실컷 평온하고 참을 수 없이 무료하다가 개강하자마자 첫 수업부터 열이 펄펄 나면서 아팠다. 누나가 셋이나 있는 동기 남자애가 열이 벌겋게 올라있는 내 이마를 짚으며, 여자라면 다 안다는 자신만만한 말투로 "예민한 애들은 이렇더라."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도 이제 성인인데, 피아노 연습을 못 했으면 선생님이랑 인생 얘기나 좀 하다 올 것이지, 바짝 얼어서는 열이 날 건 또 뭐람. 하지만 난 또 알고 있다. 평생 이럴 거란 걸.



궁극의 피자는 냉장고가 만듭니다


늦은 점심을 챙겨 먹고는 새로 산 책을 펼쳤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쓴 실존주의에 관한 책이었는데 몇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찬탄해 마지않다 그만 잠들었다. (정신의 훌륭함을 내 육체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달까!) 잠깐 잠의 세계에서 현실로 빠져나왔을 때는 이불 위에 동그랗게 침을 흘린 자국이 있었고, 이불 빤 지 며칠 안되었다는 생각과 이불 빨기의 어려움을 복기하다 다시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창밖이 어두웠다. 냉장고에서 피자와 탄산수를 꺼내고, 어젯밤 중고서점에서 산 소설책을 펼쳤다. 소설책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간식이 추가되었다. 바나나맛 젤리, 언제 먹어야 하는지 몇 가지 상황을 포장 뒷면에 죽 나열해놓은 뻥튀기 - 심심할 때, 엄마가 잔소리할 때, 씹고 싶을 때, 남편과 싸웠을 때 등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진짜냐고요? 호클락칩스를 검색해보세요- 같은 것.


갓 한 카레보다는 하루 묵은 카레가 맛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카레의 정석이긴 하지만, 식은 피자도 식은 카레 못지않게 맛있다.(이것도 역시 모두가 알고 있는 피자의 정석이려나?) 나만의 완연한 피자를 즐기는 법은 이렇다. 좋아하는 집에 반드시 혼자 가서 - 둘이 가면 피자가 남을 일이 없으니까요- 피자 한 판을 주문한다. 배달도 되지 않고, 느릿느릿 만드는 집이 최고다. 이런 집은 제대로 만들고, 대부분 평타 이상이다. 게다가 음식 맛은 공간과 분위기가 절반 이상을 좌우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배달 음식은 여간해선 먹지 않는다. 쪼끄만한 배달용기에 공간과 분위기를 죄다 담아올 순 없으니까.


아무튼 식전 빵을 먹으면서 피자를 기다리면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데, 갓 나온 뜨끈한 피자의 매력 또한 무시할 수 없으므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두어 조각을 먹고 포장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두면, 비로소 최고 맛있는 피자를 먹을 준비가 끝난 것. 뜨끈한 피자는 기껏해야 두어 조각을 먹을 수 있는 반면, 식은 피자는 희한하게도 남은 여섯 조각을 한 번에 다 먹어도 끄떡없다. 피자 한 판을 다 먹고 나니 차가운 온도 덕분인지 들끓던 열이 어느새 가라앉았다.



차가워도 괜찮아


"난 꼭 갓한 밥을 냉장고에 넣었다 먹어."

대학교 때 한 학기 동안 같은 수업을 들었던 언니의 말. 엄마가 새 밥을 해주면 꼭 냉장고에 넣는 통에 혼도 많이 났지만, 그녀는 냉장고에서 식은 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했다. 그럴 리가. 그 말을 듣고 몇 번 따라 해 본 적이 있는데, 밥맛은 입천장이 델 정도로 허연 김이 풀풀 오를 때 얼른 한 술 떠 넣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내게 냉장고 밥이 맛있을 리가 있나.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피자도 누군가에겐 맛없을 수 있다. 빵은 말라서 딱딱하지, 소스는 눌어붙었지, 야채는 축축하지, 이걸 그냥 먹는 게 맛있다고?(네! 완전!)


으레 따뜻해야, 뜨거워야 한다고 믿는 것들이 있다. 따뜻할수록, 뜨거울수록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 오븐에서 막꺼낸 피자라던가 갓 지어 김이 폴폴 나는 밥, 그리고 사람의 마음 같은 것. 요즘 사랑의 온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갑자기 들끓는 열처럼, 순식간에 번지는 불처럼, 제 안의 열기를 머금지 못하는 밤하늘의 불꽃처럼 뜨겁고 번쩍거리고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리는 게 '적정한' 사랑의 온도라고들 하는데, 다들 그런 사랑 한 번쯤 해보고 싶어 안달 난 것도 같은데, 그럼 나는 애당초 사랑 같은 것 하기에 글러먹은 사람이 아닌가 하고.


그러다가 또 냉장고에서 꺼낸 피자나 밥을 생각하면 슬그머니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온도는 다른 거라고, 사랑을 냉장고에서 꺼내는 나와 같은 사람, 서늘한 사랑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나의 지난 연애를 들추어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반짝했던 시기보다는, 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그게 일상이어서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굳이 가늠할 필요가 없는 시기가 더 많았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고, 점심을 먹다가 생각하고, 무시로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도 생각하고, 꿈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식은 피자 한 조각을 타고 갑자기 사랑이야기까지 왔지만, 내가 만약 사랑 앞에서 갑자기 화르륵 열이 나고 어쩔 줄 모른다면 그건 마치 연습하지 못한 채 피아노 앞에 앉은 기분일 거다. 에라이! 눈 딱 감고 건반에 손을 올릴지, 잽싸게 냉장고 속으로 들어갈지는 그때 가서 고민해보는 것으로. 어쨌거나 식은 피자는 맛있습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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