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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은 아주 연하게 끓여놓을게

사랑

by 꽃반지
채소 우린 물을 베이스로 한 시래기 된장국


"혹시 베지테리언이세요?"

마주 앉은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물었다. 말할 이유가 없다면 여간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다. 굳이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채밍아웃으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정확히는 나를 별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다. 채식이요? 이건 드세요? 저건요? 진짜 풀만 먹어요? 에이, 계란도 먹는데 무슨 채식주의자예요? 등등.


"아... 네."

서로의 관심사가 요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는데, 대화의 어느 대목에서 내 정체가 탄로 났는지 모를 일. 또다시 예의 지겨운 질문이 반복되겠구나 싶어 가벼운 한숨을 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그다음 질문에 귀를 의심했다.

"몇 단계세요?"

"네? 어떻게 아세요?"

"아, 외국에서 일할 때 많이 봤어요. 외국은 채식하기가 편해서 그런 게 잘 돼있는데 한국은 아무래도 어렵잖아요."

벌떡 일어나 상대방의 양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저는 채식을 이런 이유로 하려고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 잘 안되고요, 계란도 가끔 먹고, 어떤 날은 진짜 고기가 먹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날도 있고요, 그리고... 그리고요... 그날 우리의 대화는 카페 마감시간에 맞춰 겨우 끝났다.



사랑 1


"저녁은 먹었어요?"

숙소 거실에 앉아 저녁 삼아 당근 케이크를 퍼먹고 있는 나를 보고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제주행이었다. 남들은 몇 번씩 가볍게 다녀온다는 제주를, 난 썩 내키지 않아서 아주 오래전 여행으로 - 그날도 갑작스럽긴 했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비행기를 타러 갔으니 - 다녀온 게 한 번, 출장 목적으로 또 한 번 다녀온 게 전부다. 이번에도 그랬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표를 끊고 가방에 생각나는 것들을 마구 담은 다음, 혹시나 몰라서 여권까지 챙기고 공항으로 달렸다.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은 여행이니 지금 제주에는 하염없이 비가 온다는 사실을 내가 알턱이 있나. 비 내리는 제주를 굳이 여름도 물러간 지금 찾는 관광객은 드물었고, 예고 없이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피해 서둘러 체크인을 했다. 숙박객은 나 혼자. 핸드폰에는 '호우경보'가 몇 번이나 울렸다.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말에 주인아주머니가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말아주셨다. 멸치 향이 훅 풍기는 육수에 계란 고명이 그득 올라간 국수였다.

"아, 죄송해요. 저는 채식을 하고 있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크림이 가득 들어간 당근 케이크가 느끼해 더는 못 먹을 것 같기도 했지만, 아주머니가 나를 생각해 만들어주신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싶었다. 국수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 설거지를 했다. 아주머니는 당신이 10년 동안 육지에서 국수 장사를 했다며, 맛이 괜찮지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사랑 2


제주에서 비건 식당, 비건 메뉴만 찾아 먹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비에 갇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많았고, 순두부찌개 하나를 시켜도 조개, 새우, 고기가 들어 있었다. 며칠쯤 지나니 속이 많이 불편했다.


첫날부터 부쩍 친해진 대화의 주인공은 현재 작은 식당을 하고 있는데, 제주도에서 잘 가려먹질 못해 속이 엉망이라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속이 편한 식사를 만들어 주었다. 식당이 고기를 주 메뉴로 하고있어 잠깐 고민하더니, 데친 야채를 듬뿍 먹고 싶다는 내 주문에 가게에 있는 야채를 데치고, 마침 시래기가 있다며 야채 데친 물에 된장을 풀어서 시래기국을 끓여주기로 했다.

"언제쯤 도착하니? 된장은 아주 연하게 끓여놓을게."라는 그 말이 왜 이렇게 따뜻한지, 가게로 향하면서 줄곧 카톡의 그 문장을 곱씹어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스치고 어떤 이는 내 곁에 잠시 머무르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래 머무른다. 각자가 가진 키워드를 서로에게 꺼내 보이는 과정에서 파바박,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긴다. 나는 그 소란이 싫어서 관계 맺기를 교묘하게, 은근히 피해 다녔던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키워드 중 새로 생긴 하나가 '채식'이고, 그 키워드를 본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반응 중 하나는 "너의 채식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번 이해해보마." 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저 문장에 채식 대신 어떤 단어를 집어넣어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채식, 혹은 상대방이 가진 그 어떤 키워드든 이해하기 어렵고 이상하고, 때로는 괴상한 것으로까지 치부하면서 상대방의 세계를 깔아뭉개려는 무례한 태도일 뿐이다. 그것은 이해와는 차원이 다른 세이다. 그들은 줄곧 나에게 자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를 어필한다.


고백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밑바닥에 깔린 투명한 무례를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해해보겠다는 그들에게 얼마간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가지고 대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된장은 아주 연하게 끓여놓을게, 그 한 문장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으면서. 그 사람은 채식을 하지도 않고, 고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데도 그저 가진 채소를 가지고 나를 위한 밥상을 만들어 주었다. 속이 불편하다는 내 말에 된장은 아주 연하게 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제 채식하는 것을 숨기지도, 괜히 상대방에게 미안해하지도, 채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자책하지도 않겠다. 나는 그냥 채식을 한다. 이건 내가 가진 하나의 키워드이자 관계를 거를 수 있는 필터다. 누군가 내게 "채식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이해해볼게요."하고 말한다면 그 관계는 그냥 싹둑 끊어버려도 전혀 아쉽지 않다. 내가 채식을 하지 않더라도 그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테니까. 사랑은 '기꺼이'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는 것이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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