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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에서 벗어납시다

채소의 고통을 염려하는 질문 앞에서

by 꽃반지
사진 속 채소의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채식을 시작하거나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일단 몸담고 있던 세계에 대한 대혼란을 겪게 된다.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찾곤 하던 아쿠아리움, 아무런 생각 없이 스쳤던 동물원 안의 돈가스집과 치킨집, 한우를 갈아 만들었다는 우리 귀한 개님을 위한 사료 광고, 더러움을 뒤집어쓴 비둘기 떼를 혐오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재발견... 생명 존중에 대한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결코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발을 들이기 전에 얼른 발을 빼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00퍼센트가 아니면 거짓일까요


사실은 정말로 아무도 관심 없을 줄 알았던 <어느 채식주의자의 고백>이라는 글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셨다.

댓글 중에 - 내용이 장황해서 정리가 잘 되지 않지만 내 식대로 정리한다면 아마 - "동물의 고통 때문에 채식을 한다고 하면, 식물의 고통은 생각 안 하나요? 위선적이네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훗, 생명을 존중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고? 그럼 식물은 왜 먹니?"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아, 제가 아직 식물은 못 끊어서요..."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참조해 답을 달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물론 이것이 식물을 함부로 다뤄도 좋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당연히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동물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식물에게도 그럴 확률이 높다. 다만 아직까지 인류는 식물을 섭취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가 없다...(중략) 문제는 이렇게 식물의 고통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식물 권리'를 염려하는 식물보호주의자는 없다는 점이다... 만일 진심으로 식물의 고통을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서둘러 비건이 되어야 한다. 식물을 가장 적게 죽이고, 식물의 고통을 가장 최소화하는 방법이 바로 비건식이다.

김한민, <아무튼 비건>


댓글을 단 이가 식물의 고통과 더불어 주장하는 것은 '담배를 끊으려면 실패한다. 그냥 담배를 안 피우면 된다'이다. 이게 채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생명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고기를 끊으려니 실패한다. 그냥 생명을 안 먹으면 된다. 안 먹곤 못살겠지? 그러니까 채식은 위선이야.'로 귀결되는 듯하다. 담배는 기호식품이고 음식은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선택인데 담배를 끊듯이 음식을 끊을 수는 없지 않을까. 저도 먹고살아야지요. 다만 댓글에 대한 변을 해보자면 저는 꽃을 꺾지 않으며, 분재를 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먹으며 남기거나 버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정도로 달 수 있겠지.


사람은 포식자다. 애당초 생명존중이 선과 악의 범주에 드는지도 의문이지만, 동물 권리를 존중한다는 나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마치 고기가 먹고 싶어서 콩고기를 먹는다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위선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식물이 느끼는 고통이 동물이 느끼는 고통과 흡사하다고 한다면, 인간이 식물을 먹지 않고 물과 빛만으로 살 수 있다면, 그때도 내가 굳이 식물에게 고통을 주는 식물식을 고집하면서 '난 생명을 존중하니까!'라고 떠들고 다닌다면, 그런 나를 가리켜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왜 100퍼센트가 아니면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1퍼센트라도 실천할 용의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



고백하자면, 족발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사진 속 동물의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나는 채식을 하기 비교적 쉬운 편에 속했다. 일단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생선과 해물은 원래 먹지 않고, 혼자 살고 있어 식단을 마음대로 꾸릴 수 있는 데다, 요리를 곧잘 하는 편이라 여러모로 채식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온몸과 마음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나마 회식 때 한 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하는 고기도 안 먹겠다고? 자취생이?'

'영양부족으로 쓰러지면 어떡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거야. 나 같은 회사원은 사회생활도 해야 되는데...'

마음의 소리, 소리, 소리들.


채식 관련 책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이해하고, 오해에 대해 바로 잡으려 하고, 요리 공부에 좀 더 매진하고, 관련 커뮤니티에도 나갔다. 못 먹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되려 고기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질 때도 있었는데, 채식 모임에서 나의 이런 고민이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해 '아, 나는 채식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더욱 무거워진 고민만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와 늦게까지 잠 못 이룬 밤도 있다. 존경하는 스님께 "고기가 너무 먹고 싶을 때는 어떡하죠?"라는 질문을 했더니 "몸이 필요할 땐 드세요."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 또 다른 고민으로 밤새 뒤척거리기도 했다.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채식으로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를 완벽히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당연히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먹으라고 있는걸 왜 안 먹는다고 난리인 게야?" 하고, 나이 지긋한 어느 분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고기에 대한 욕구가 화산 터지듯 솟구칠 때가 있다. 어젯밤엔 꿈에 갑자기 족발이 나왔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잠에서 깨어 족발집 전화번호를 찾아봤다. 그래, 3년 전에 먹고 안 먹었는데 한 번쯤이야 괜찮지 않을까 하고.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나도 좋고 너도 좋자고 하는 일인데, 나 말고 채식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 없던데, 나는 애당초 채식주의자가 될만한 자질이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한다. 고기에 대한 욕구가 단순히 과거 식습관과 기억의 잔재인 건지 아니면 진짜 몸이 필요로 하는, 식물에서 절대 얻지 못하는 어떤 영양소가 족발에는 있는 것인지 어떤지. 이런 날엔 치즈나 계란을 먹는다. 나의 합의점이다.


나는 채식을 시도한 지 반년 정도 된 새내기이다. 겨우 채식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에 서서 발을 뺄까 말까 갈팡질팡 고민하는 경계인이기도 하다. 가끔이지만 강렬하게 치솟는 욕구에 시달리고, 번뇌와 고민으로 때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한다. 채식뿐 아니라 내가 발을 디민 어떤 세계든 나는 어쩌면 영원히 백 퍼센트는 되지 못할 수 있다. 시도만 하다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누군가가 고민 없이 매끄럽게 달려 나가는 길을, 나는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면서 서툰 한걸음을 내딛는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일 뿐, 나의 매 순간이 백 퍼센트가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채식주의자의 고백>

https://brunch.co.kr/@ringringstar/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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