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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08. 2019

섣부른 라벨링을 시도하는 당신에게

 퉁치지 말아요, 우리


"채식주의자는 성욕이 없다며? 진짜야?"


<뜬금없는 개소리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서른여섯 가지 방법>이란 책을 아직 읽지 못해서 - 왜냐하면 출간되지 않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써주실 작가분 안 계신가요! - 묵묵부답으로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나의 묵묵부답이 상대에게는 긍정으로 여겨졌는지 그는 재차 물었다. "너도 성욕이 없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 전에 없던 굉장한 파괴욕이 들끓는 바람에 힌두교에서 '파괴의 신'이라 불리는 시바 신을 잠깐 소환해 상대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찬 후, 장렬하게 나동그라진 그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여주고 싶었다. "너의 성욕을 파괴한다, 시바."



편하고 안전한 너, 스테레오타입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스테레오타입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 고정관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놀랄만한 사실은 이어지는 문장인데 '대개의 경우 뚜렷한 근거가 없고 감정적인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라고 쓰여있다. (두산백과 참조)


살아오는 동안 실로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이 나와 함께 해왔다. 나는 스테레오타입에 의해 타자에게 받아들여지거나 외면당했으며, 나 역시 스테레오타입에 의해 타자를 분류하고 받아들이거나 밀쳐냈다. 믿거나 말거나인 혈액형부터 시작해 고향, 태어난 순서, 성별, 나이, 직업, 좋아하는 색, 취미, 취향, 종교, 체형... 이제는 나아가 나의 성욕까지. 객관적인 사실도, 검증된 판별법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스테레오타입에 의해 타자를 분류할까. 그건 편하기 때문이다. 스테레오타입은 쉽고, 경제적이고, 안전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한다.


한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낯선 세계와 부딪친다. 낯선 세계는 곧 날 선 세계이고, 나를 향해 날카롭게 날을 세운 미지의 세계는 무한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처음 만나는 사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언어, 이름조차 생소한 메뉴, 개강 첫날... 그에 반해 익숙한 것은 편안하다. 사람은 두려움을 편안함으로 대체하기 위해 낯선 세계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낯선 세계를 낱낱이 파악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뿐더러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눈 앞의 낯선 세계를 기존의 익숙한 세계로 재빨리 치환해버린다. 스테레오타입이라는 심리적 방어 쿠션 마련에 몰두한다.

"0형이세요? 어쩐지..."

"장녀라고? 책임감이 강하겠네."

"요리를 좋아하신다니 꽤 여성스러운 성격이신가 봐요."


자, 이제는 나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라벨까지 하나 붙었다.



전 이럴 줄 알았어요


지난 주말, 우연히 한 여성분과 티타임을 가지게 됐다. 열일곱 살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다가 얼마 전 한국에 돌아와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내는 분인데, 간간이 눈인사만 주고받다 차나 한잔 하자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녀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한국 문화의 우수성에 눈뜨게 되었다며, 한국만이 가진 고유한 색채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고 한 발씩 내딛고 있었다.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환한 미소 덕분인지 반짝거린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단단하고 아름다운 내면 덕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 여기서 퀴즈. 그녀는 몇 살일까요?


에이,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글쓴이의 의도가 불순합니다!라고 답하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속 깊이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나이 따위 아무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녀는 꿈을 위한 한 발을 내딛으면서 많은 장벽에 부딪친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듣는다고. 그녀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했던 말.

"저 보세요. 나이 많죠, 결혼 안 했죠, 남자 친구 없죠, 서울대 안 나왔죠. 근데 전 한국 올 때 이럴 줄 알았어요. 싸울 결심 하고 왔어요."


수많은 스테레오타입과 함께 살아왔지만, 그동안 무탈하게 지내왔던 이유는 나 역시 한편으로는 스테레오타입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나를 규정짓는 타자의 시선, 자기 좋을 대로 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누군가의 시선에 대한 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낯선 세계에 나를 알릴 필요 없어 '경제적'인 데다, 그들이 생각하는 '안전한' 사람이 되어 쉽게 무리에 받아들여지면 나로서도 땡큐 쏘 마치.


장녀라서 책임감이 강할 거라는 인상,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어 늘 책을 많이 읽고- 실제로는 그냥 많이 사서 쌓아둡니다- 지적일 거라는 이미지, 요리를 좋아하니 결혼생활을 잘할 것 같다는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내 결혼에 대한 긍정적 전망 같은 것들. 어쨌거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채식을 시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례함이 가득 담긴 질문을 종종 받는다. 본인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발톱을 숨긴 질문을 건넨다. 낯선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드리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만 호기심과 적대감은 분명 다르다. '정상= 자연스러움'이라는 공식을 만들고는 나를 비정상인으로 규정지으려는 꽤나 적극적인 시도를 여기저기서 목도한다.

"뭐든 잘 먹는 애가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너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니?" 직장 상사의 말, "채식하면 성격 나빠진대." 채식도 안 하면서 성격이 나빠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싶은 친구의 말, "그럼 님 앞에서 고기 먹는 사람 보면 막 혐오감 느끼고 토할 거 같고 그래요?" 상호존중이 뭔지 잘 모르는 지나는 행인 1의 말.


채식을 시작한 지 고작 반년 정도 되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에게 아직 미지의 세계인 '채식주의자'에 대해 빠르고 손쉽게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규정짓고 싶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를 떠올리면 재빨리 떠올릴 수 있는 라벨이 필요한 것이다. "아, 채식주의자세요? 어쩐지..." 하고.


타인들로부터 발톱이 삐죽 나온 질문을 받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스테레오타입으로 상대방을 분류하고 규정짓고 나 편할 대로 해석하고 있는가'였다. 철제 캐비닛 서랍 하나를 삐죽 열어 많은 사람들을 클립 쏟듯 그 안에 쏟아붓고는 라벨을 붙이고 탁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도 당신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고민에 대해 어떤 분이 한 대답이 내 마음에 남았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일 뿐이에요. 그냥 편하게 사세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넌 문제가 없어.'라는 그 대답이 실은 얼마나 약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나의 마음에 툭, 하고 떨어져 잔잔한 파문일으켰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낯선 것을 경계하고 나와 비슷한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뭘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 속담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남과 다르면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내쳐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테다. 내가 속한 세계에 '둥글둥글' 어울리기 위해, 스테레오타입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남과 다른 내 모습을 시시각각 점검하고 스스로 정을 내리찍으며 아등바등 애써왔던 내 모습을 반추했다.  


여전히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공식처럼 박혀버린 수많은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그들도 호흡처럼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편하고 경제적인 잣대로 당신을 판단하기보다는, 시간과 노력을 내 눈 앞의 당신에게 쓰고 싶다. 낱낱의 개인을 만나고 싶다.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이라는 말은 닳고 닳아 너널너덜 해진 지 오래지만, 나는 이 닳아빠진 말을 이제야 주워 들고 가슴에 새긴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그렇게 쉽게 퉁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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