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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06. 2019

#7. 냉정과 열정 사이


3차였다. 적당히 술이 오른 대표가 기분이 좋은지 한 손에 잔을 들고일어났다.

"여러분, 내가 어떤 사람 좋아하는지 알지? 열정! 열정 있는 사람이 좋아! 내가 평사원이었을 때 말이야..."

이어지는 대표의 열정 예찬을 바쁘게 한 귀로 흘리며, 옆에 앉은 동료에게 속삭였다.

"나 퇴사할까?"

"야 너도?"
"야 나두!"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열정 알레르기'가 있다. 열정이란 말만 들어도 뒷덜미에 소름이 쫙 끼치고, 팔에 후드득 닭살이 돋는다. 혹여 넘치는 열정을 과시하는 이와 접촉이라도 한 날엔 물가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헐떡헐떡 숨이 가빠온다.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열정 공화국이다. 어딜 가나 열정, 열정, 열정 투성이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지원자의 열정을 체크하는 항목이 있다. '살면서 본인이 가장 열정적으로 한 일과 그 결과를 500자 내로 설명하시오.' 귀사에 어떻게든 붙기 위해 온갖 기억을 쥐어짜 내고 각색하여 그럴싸한 자소서를 쓰 위해 분투 중입니다. 제 삶에 가장 열정적인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꼭 합격시켜주십시오! 탈락하고 싶다면 이렇게 답안을 써봐도 좋지 않을까.



그래, 나 냉정한 사람이야


열정 공화국에서 말하는 열정이란 '절절 끓는 100도씨의 온도'에 다름 아니다. 끓어 넘치기 직전의 냄비처럼 요란하고 뜨겁고 들썩거리는 것, 그걸 가리켜 이 사회는 열정이라 부르며 칭송한다. 일도, 사랑도 뜨겁게! 화끈하게! 모두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가운데 좀처럼 미동도 없고 뜨듯 미지근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가는, 바로 온도 체크를 당한다. "남들 좀 봐. 이것밖에 안 돼?" "좀 더 열정적으로 할 수 없어?" 사회는 내게 좀 더 뜨거워질 것을 주문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야근주말출근. 스케줄에 맞춰 업무를 마쳤는데 굳이 왜 사무실에 남아야 할까? 밤이 되어 해가 저물어도 모니터 불빛만으로 끓어 넘칠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야 할까? 주말출근은 더 웃기다. 한 부서가 스케줄 때문에 주말 근무를 하게 됐는데, 미안하니까 나머지 부서도 다 나오라는 대표의 명령이 있었다. (무슨 논리인지...) 근로자의 날에도 출근해서 멀뚱멀뚱 모니터를 보며 앉아있었다. 일없이 시간만 죽이며 모니터 앞에 앉아있으면, 피로와 분노가 쌓여 이마에서 정말로 뜨겁게 열이 난다. 영문도 없는 주말출근과 휴일 출근 앞에서 다들 메신저로 열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하루 종일 회사 욕을 했다. 이게 바로 대표가 말하는 열정이려나. 한국사회에서 끓어 넘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참 어렵다.


그렇다고 내가 매사에 시큰둥하고 심드렁한 사람은 아니다.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잘해보고 싶은 일은 묵묵히, 끈기 있게 해 나가는 편이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실수나 시행착오 앞에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도망간 적은 없다. 아, 도망갔다가 번번이 되돌아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만.



가끔씩은 미지근해 집시다, 우리

사찰식 고추김치

사찰요리는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신채五辛菜란 말 그대로 '다섯 가지 매운맛이 나는 채소'다. 파, 마늘, 부추, 흥거, 달래를 꼽는데, 흥거는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다. 대신 매운맛을 내는 양파도 사찰요리에서 쓰지 않는다. 사실 파, 마늘을 빼고 한국 요리를 생각하기란 어렵다. 애당초 단군 신화에서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은 것도 쑥과 마늘이지 않은가.


일단 대표적인 게 김치. 엄마가 김치를 한번 담을라치면 절구 가득 마늘을 찧어 고춧가루를 시뻘겋게 푼 양념장과 버무려 배추에 척척 발랐다. 온 집에서 마늘향과 매운 내가 진동했다. 다대기(다진 양념) 또 어떻고. 고추, 양파를 갈아서 마늘, 간장, 참기름에 맛있게 버무린 다대기는 요리의 맛을 궁극으로 끌어올린다. 파를 쫑쫑 썰어 넣은 양념간장은 튀김에 빠질 수 없고, 앞뒤로 노릇하게 부쳐낸 파전은 비 오는 날 꼭 먹어야 한다.


아쉽게도 사찰요리는 이 모든 것들과 결별이다. 오신채를 쓰지 않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이 채소들이 사람의 몸을 뜨겁게 만들어 쉽게 흥분 상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냉하면 오신채가 좋다.) 또 다른 이유는 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데, 향이 강한 음식이 불편감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스님께 들은 바로는, 부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어느 집 마늘밭을 마음대로 헤집어 쑥대 밭을 만들어 놓아 마늘밭 주인이 울상을 지으며 부처님께 고하자, 부처님이 "앞으로 우린 마늘 금지!"라는 심플, 명료한 율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쏘 쿨.


평생 오신채를 먹지 않으니 스님들은 대체로 몸이 찬 편이다. 오신채를 금하는 이유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하루 종일 도 닦아야 하는데, 그럼 잘 먹어서 기운이 펄펄 나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몸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하는 것이 오래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라... 나는 그 해답을 가수 곽진언에서 찾았다.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참가자들이 너도나도 빼어난 고음을 자랑하며 돌고래 초음파에 가까운 주파수를 쏘아댈 때, 그 자리에서 곽진언은 묵직하게 노래했다. 폭발적인 성량의 돌고래 고음이 귀를 울렸다면, '저음의 기적'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곽진언의 목소리는 심장을 울렸다.


열정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열정이 누구에게나 절절 끓는 100도씨의 온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무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이 칭송하는 열정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열렬함이라면, 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한다. 되고 싶지 않다. 뜨겁게 들썩이며 끓어 넘치기보다 은근히, 묵직하게, 오래 따듯하고 싶다. 뚝배기처럼 은근한 온도를 오래 품는 열정도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비 오는 날 파전도, 새콤한 양파 절임도, 밥 한 그릇 뚝딱하는 마늘장아찌도 사찰요리엔 없지만, 대신 묵직하고 차분한 저음 같은 매력이 있다. 때론 그 은근함에 슬쩍 취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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