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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14. 2019

당신의 과정엔 애정이 있나요?



내가 듣는 사찰요리 수업은 보통 네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룬다. 다 함께 스님의 시연을 보고 난 후, 조원들과 요리 하나를 같이 만들고 맛보는 것으로 끝난다. 사찰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자리로 돌아와 오이 하나를 쥐고는 채를 썰기 시작했는데, 그런 나를 보던 아주머니 한 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채 못 썰죠?"

"아, 네..." (지금도 못 써는 건 마찬가지다.)

"그거 이리 줘요. 우리 딸보고 썰라고 해. 얘 조리과 다녀."


순간 지구 내핵에서 시작된 것 같은 깊고 뜨거운 빡침이 순식간에 맨틀과 지면을 통과해 내 신발 밑창을 뚫고 정수리까지 닿았다. 아니, 누구는 날 때부터 채 잘 써나? 마그마 분출 직전의 내 표정을 보고 조리과 다니는 딸이 "아, 엄마 왜 이래."하고 그녀를 말렸지만, 아주머니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지! 얼른 니가 해."하고 내 앞에 놓인 오이를 가져갔다. 내 마음이 좀 넓었다면 "제가 요리를 잘하면 이 수업에 안 왔겠지요. 잘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제가 한번 해볼게요."하고 이야기했겠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은 딱 오이 단면만큼의 크기였다.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살짝 더 . "네, 그럼 잘하는 사람이 다 하세요." 나는 아예 도마까지 밀어주고는 쥐고 있던 을 탁 놓고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오이채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뭐 하나만 걸려라, 진짜.


"어, 그거 아까 스님이 가르쳐 준거랑 다른 방식이잖아요?"

마침내 오이채 눈뜨기 권법이 그녀의 실수를 한 건 발견했지만, 아주머니는 "어차피 입에 들어갈 건데 좀 다르면 어때요? 대충 하면 되지."하고 내 공격을 가볍게 퉁겨냈다. 와, 내로남불이야 뭐야? 아까 채 좀 못 써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던 분 맞으세요? 그날 완성된 요리는 무슨 맛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니 끝나고 나서도 분한 마음뿐이었다. (제가 이 정도 인성입니다, 여러분.)


영화 <줄리 & 줄리아>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전설의 셰프, 줄리아 차일드실존인물이다. 미국인인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갔다가, 우연히 프렌치 요리에 눈을 뜬다. 그 유명한 르꼬르동 블루에 어렵게 입학했지만, 혼자 유일한 여자인 데다 실력도 영 젬병이라 자주 무시당한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양파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새 썰면서 실력을 다진다.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녀는 마침내 미국 요리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셰프가 된다. 나도 그날 집으로 돌아와 밤새 오이를 썰었다면, 요리사에 한 획을 긋진 못해도 도마에 칼자국 정도는 새길 수 있었을 텐데. 전설의 셰프가 될 운명은 아닌지 '짜증 나는 데 이제 가지 말까...'라는 고민을 하다 금세 잠에 빠졌다.



이게 왜 되지?

학교 다닐 때 정말로 못했던 두 가지가 있다. 바느질과 서예. 같은 동작의 반복을 못 참는 성격이라 바느질하는 시간이면 온몸이 혓바늘 돋은 것처럼 따끔거렸고, 서예 시간엔 석봉이 어머니가 되어 차라리 떡을 썰고 싶었다. 두 가지 모두 인격 형성에 좋다는데,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켜서 인격을 형성해봤자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게 내 지론. 반항심만 더 커지지 않을까? 아무튼 바느질과 서예 모두 제출 과제가 있었고 성적에 반영되었다. 과제를 내긴 내야 했다. 하기 싫어 끝까지 미루고 미루다 시침질은 시치미를 떼며 스테이플러로 박았고, 판본체를 써오라는 서예 과제는 납작붓을 들어 살살 그렸다. 결과는? 서예보다 바느질을 더 싫어했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박은 스테이플러는 뭐 그렇다 쳐도, 나름 감쪽같이 그렸다고 자부했던 납작붓 글씨는 어떻게 들켰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두 과목 모두 실기 0점을 받았다.


수업에선 채 썰 일이 많았다. 잘 써는 사람도 많았다. 정말로 날 때부터 채를 잘 썰었던 것 같은 포스를 풍기며, 기계처럼 일정하고 얇은 굵기로 착착착 채 써는 고수들이 득실거렸다. 그때 그 일도 있고, 고수들 사이에서 괜히 기가 죽어 채 썰 재료는 다른 분 앞에 슬며시 밀어놓고 다른 걸 했다. 생각해보니 채 썰기도 같은 동작의 반복.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며 애써 나를 설득했다. 수업에 채칼 가져와도 되려나?


내가 썬 게 오이였나, 당근이었나. 그날도 채 썬 결과물이 들쭉날쭉한 굵기와 길이로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 개성 넘치는 결과물을 본 스님이 내 곁으로 와서 채를 어떻게 써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찬찬히 알려주셨다. 스님의 칼솜씨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손을 보지 말고 칼을 잘 봐요. 칼끝을 이렇게 고정하고 물결을 타듯이..." "이, 이렇게요?" 여전히 내 결과물은 엉망이었는데도 스님은 "이제 잘하네요!" 하면서 칭찬을 하셨다.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2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번 나를 볼 때마다 스님은 "지난번보다 채 써는 솜씨가 많이 늘었네요!" 하고 칭찬해주셨다. 그동안 집에서 오이 하나라도 썰어봤으면 몰라, 사무실에서 종일 키보드만 치다 왔는데 실력이 늘 리가 있나. 여전히 스님의 칭찬을 믿지 않았지만, 마주칠 때마다 자꾸 칭찬을 해주시니 나중엔 '진짜 저번보다 좀 낫나?'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설리반 선생님이 헬렌 켈러 손바닥에  글씨를 자꾸만 써준 것처럼, 스님은 아예 내 귀에 칭찬을 새겨 넣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 달이 가고, 계절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어느 날, 스님이 나더러 처음 온 사람에게 채 써는 법을 좀 알려주라고 했다. 네?

"아, 저도 잘 못하는데요... 칼끝을 이렇게 하고, 물결을 타듯이 이렇게 이렇게... 어? 되네? 이게 왜 되지?" 채 써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과정의 애정 

"... 나는 이 과정에 애정이라는 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조금 긴 <당신은 당근을 싫어하는군요 저는 김치를 싫어합니다>라는 책에서 건져 올린 문장이다. 아주머니에게 나의 어설픈 칼질이 지적받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못하니까. 못하는 사람 대신 잘하는 사람이 맡는 게 효율적이니까. 당연한 지적에 머리 끝까지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는 내가 더 웃기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지금 가만히 돌아보면 나는 그날 아주머니에게 약간의 애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어차피 입에 들어갈 건데 좀 다르면 어때요?"라는 말을 본인이 아닌 내게 해줬으면 하는 기대, 내가 좀 어설퍼도 웃으며 넘겨줬으면 하는 기대.


못한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한두 번 가르쳐주고 끝낼 수도 있지만, 수업에서 만날 때마다 스님은 나를 기억했다가 칭찬해주셨다. 어떤 것이든. 지난번과 정말 똑같은데 "채 써는 게 많이 늘었네요." "야채도 이제 잘 볶네요." "양념장이 아주 기가 막히네요!"하고. "스님은 맨날 칭찬밖에 안 하시잖아요."하고 볼멘소리를 해도 "정말로 정말인데!"하고 웃으셨다. 수업에 참여한 다른 분들도 "스님은 맨날 칭찬밖에 안 한다"라고 불평 아닌 불평을 종종 다. 물론 웃으면서.  


이제 겨우 채 써는 법을 알 뿐,  결과물은 여전히 어설프다. 깔끔하게 썬 채는 가끔 운 좋게 얻어걸릴 뿐이다. 필 받아서 영화 속 줄리아 차일드처럼 다다다다 채를 썰어보지만, 그렇게 멋있는 척을 하면서 썬 채는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다 붙어있다. 쩝. 그래도 괜찮다. 줄리아 차일드를 응원하고 그녀의 요리를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처럼,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지금은 실기 빵점이라도 언젠가는  백점짜리 채를 썰어보고 싶다.


평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과정에 애정을 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를 썰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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