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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11. 2019

쫄지 마, 재료가 얕보니까!

두릅 튀김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메뉴가 튀김인 날은 다들 조심스럽다. 솥에는 기름이 끓고 있고,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사고는 사소한 데서 발생하기 마련이라 주의에 주의를 거듭해야 한다. 스님의 시연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튀김 솥 바로 앞에서 얼쩡거리다 기름이 얼굴에 살짝 튄 적도 있다. 다행히 흉터는 남지 않았지만.


기름이 얼굴에 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아직 그 뜨겁고 아찔한 맛을 못 잊고 있던 나는 일찌감치 튀김 솥에서 멀치감치 떨어져 있었다. 주부 내공 30년 차의 노련한 에이스 언니가 튀김 솥을 맡았다. 그녀의 지휘 아래 튀김이 바삭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 모습을, 짝사랑하는 남자 훔쳐보듯 가까이 가진 못하고 멀리서 부푼 가슴으로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 이를 짝사랑하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다들 기름 끓는 소리를 황홀한 음악 삼아 홀린 듯 멍한 눈으로 튀김 솥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해본 것도 아닌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들 잘생긴 튀김의 얼굴과 목소리에 취해있을 때, 튀김을 건질 요량으로 튀김 망을 꺼냈다. 그냥 꺼냈으면 좋았을 텐데 튀김 망을 물로 충분히 씻었다. 때맞춰 튀김을 건지려던 에이스가 내 손에 쥔 튀김 망을 보고는 "와서 튀김 좀 건져줘."라고 말했고, 나는 물기 가득 수분 촉촉한 튀김 망을 끓는 기름 솥에 덥석 집어넣었다. 그다음은 말로 안 해도 다들 알 거다. 기름과 물이 만나면서 파바박! 불꽃, 아니 물꽃 축제가 한바탕 벌어졌다. 아직 잊지 못한 기름 맛을 또 한 번 볼뻔했다. 휴.


스님이 재빨리 달려와 물꽃 축제가 성황인 우리 조 상황을 수습했다. 아무도 나를 탓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더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왜 튀김 망을 물에 씻고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제때 건지지 못한 튀김은 새카맣게 타있었고, 다 된 튀김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쫄지 마, 인생이 얕보니까!

앞에서 시연을 보이는 스님들도 종종 실수를 하신다. 스물대여섯 명의 참가자가 말없이 스님의 칼끝만 보고 있는데 어떻게 긴장이 안될까. 실수를 하면 소녀처럼 얼굴이 금세 새빨개지는 분도 있고, "맛없어도 누가 먹는다? 내가 먹는다!"하고 그간 쌓은 세월의 내공으로 천연덕스럽게 넘어가는 분도 있다. 세월 내공을 자랑하는 스님도 종종 실수 아닌 실수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이 하시는 말이 있다. "여러분, 쫄지 마세요! 재료 앞에서 안달복달하면 재료가 얕봅니다. 농담 같죠? 진짜예요."


뜨거운 맛도 봤겠다, 한번 사고도 쳤겠다, 튀김 앞에서 바짝 졸아있던 나였다. 튀김 수업이 있는 날엔 아예 저만치 멀리 떨어져 구석에 서있었다. 튀김이여, 그대를 너무 사랑하지만 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요, 안녕. 그래도 튀김을 향한 나의 사랑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세상에 튀겨서 안 맛있는 게 없다는데, 튀김 하나만 잘 배워놓으면 세상 맛있는 것의 절반, 아니 사분의 삼은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며, 그 숙명에 최선을 다하며 한걸음 더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박한 개인으로서 차마 튀김을 포기할 순 없었다. 튀김을 못 배우면 세상 맛있는 요리의 사분의 삼을 놓치는 것만 같은 패배감이 밀려왔다. 쫄지말라는 스님의 한마디가 쭈글쭈글한 내 마음을 다림질했다. 더 이상 튀김 앞에서 쫄 순 없었다.


봄이면 두릅을, 여름이면 깻잎과 고추를, 가을이면 연근과 우엉을 튀겼다. 수업마다 모든 기름솥 앞에는 튀김용 젓가락을 든 내가 있었다. 젓가락을 솥바닥에 수직으로 꽂아 기포가 젓가락 주위에 달라붙으면, 그때가 바로 튀김재료를 솥에 넣을 운명적 순간이다. 어느 날, 물이 통통하게 오른 두릅을 튀겨서 딱 건져냈는데 평소에 여간해선 말없던 스님 한분이 "튀김 잘했네."라는 5자 평을 남기고 홀연히 지나가셨다. 5자 평이 내겐 별 다섯 개 같았다. 끓는 기름에 물을 끼얹던 내가 마침내 튀김 마스터로 거듭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실수는 아프다. 부끄럽고 따갑다. 그래서 다시 돌아보기 싫다. 학생 때, 오답노트가 성적 향상의 비법이라고 선생님이 입 아프게 말했지만, 기껏 시간 들여 만들어둔 오답노트를 한 번도 제대로들여다본 적이 없다. 오답은 곧 실수였고, 실수 모음집이나 다름없는 오답노트의 존재 자체가 싫었다. 실수만 탓했지, 실수에 대한 대처법은 내게 없었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수록 더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업무에 대한 실수, 관계에 대한 실수, 사랑에 대한 실수...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고 그래서 아프고 부끄러웠지만, 다시 또 실수할까 움츠러들 뿐 앞으로 한발 나갈 엄두가 안 났다.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마우스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상사에게 혼날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나고 있던 사람과 언제 헤어질지 몰라 두려웠고, 누군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면 그게 괜히 내 탓인 것만 같아 두려웠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고 두렵던 날들이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마음이 아프고 따가워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는 튀김 요리를 잘한다. 많이 해봤으니 당연하다. 두릅도, 버섯도, 고추도, 당근도 잘 튀긴다. 끓는 기름에 물을 집어넣었으면 앞으로 안 그러면 된다. 잘할 때까지 해보면 된다. 튀김뿐인가. 뭐든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일도, 사랑도, 공부도, 취미도, 그 뭐든.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아직 지난날의 실수에, 실체 없는 두려움에 갇혀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쫄지 마! 인생이 얕보니까!" 우리 모두 쫄지 말자. 쫄려고 태어난 건 아니니까. 우린 맛있는 걸 먹으려고 태어났고, 인생에 튀길 건 너무나 많다. 이상, 튀김 마스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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