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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1. 2019

너무 맛있어서 헛웃음 나옴

옹심이 팥죽


현관문을 열었다 도로 닫았다. 새벽부터 핸드폰을 울리던 폭설주의보가 마침 주머니에서 또 한 번 울렸다.  

"오늘 같은 날은 휴강 안 하나?"

신발을 못 벗고 입구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밖으로 한발 내딛자마자 푹, 하고 발목까지 눈에 잠겼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이 날씨에..."

기들이 신는 소리 나는 신발처럼,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뒤따라 나왔다. 푹, 미쳤지 미쳤어. 푹, 미쳤지 미쳤어...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았는데 바람에 우산이 몇 번이나 뒤집어졌다. 이 눈바람에도 나서는 내가 웃겨서 그런 건지, 얼굴 정통으로 강풍을 맞느라 추워서 그런 건지 어느새 눈물로 눈가가 촉촉했다. 그해 첫눈이었지만, 첫눈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옹심이만 아니었어도...

"스님, 오늘은 휴강하셨어야죠~ 눈이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휴강은 무슨 휴강이에요."
샤워하고 막 나온 듯, 눈에 젖은 촉촉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스님께 웃으며 투덜거렸더니 스님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오늘의 메뉴는 옹심이 팥죽. 웬만한 메뉴였다면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옹심이 팥죽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옹심이 로망' 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가 팥죽을 할 때면 우리 남매에게 옹심이 반죽떼어주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신이 나서 그걸로 주사위 모양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고, 공룡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낄낄대며 별걸 다 만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만들면 안 익는다!"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리 없었고, 보통 그런 모양은 제대로 안 익어 한입 베어 물면 속에 허연 가루가 그대로 보였다. 만들 땐 신나서 만들었지만, 가루가 씹히는 설익은 옹심이는 어린 입에도 맛이 없었으므로 결국엔 엄마가 빚어 투명하게 잘 익은 것들만 골라먹었다. 그럼에도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반죽을 배당받으면, 우리 남매는 뭐에 홀린 듯 예술성은 돋보이나 실용성은 제로인 주사위나 반지, 공룡을 계속 만들어댔다. 급기야 나중엔 '반죽 책임제'가 만들어졌다. 반죽 책임제의 정신은 "만든 놈이 먹는다". 반죽 책임제 탄생 후에도 우리 남매의 예술혼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몰랐기 때문에, 대부분 맛없는 옹심이를 씹어야 했지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조금 커서는 한집에 살면서도 하루에 한 번 서로의 얼굴 보기가 어려워, 가족이란 이름이 무색할 때가 많았다. 혼자 살게 되면서는 동지다 뭐다 하는 절기 자체를 잊고 지냈다. 동지는 무슨, 제때 밥도 못 챙기고 미역국도 잊은 생일이 많은데. 여럿이 둘러앉아 옹심이를 빚는 일이 어느새 내게 로망으로 자리 잡았다. 1인 가구가 옹심이 하나 먹자고 좁은 방에 친구들을 죄다 불러 모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 외로이 방구석에 앉아 옹심이를 빚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슬펐으므로 반드시 오늘 빚어야 했다.



촉촉하고 말랑하고 따뜻한

찹쌀가루에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주면서 힘 있게 치대면 옹심이 반죽이 완성된다. 말이 쉽지, 반죽을 알맞게 하는 게 참 어렵다. 촉촉하고 말랑하고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 흐응 하고 다시 올라오는 그 정도의 알맞음. 물이 모자라면 모양을 빚을 때 금세 갈라지며 똑똑 끊어지고, 물이 넘치면 반죽이 질어 끓여낸 옹심이가 푹 퍼진다. 처음 반죽을 배울 때는 "물을 조금씩 넣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잊고, 물을 한 번에 홀랑 다 넣었다가 세상 찹쌀가루를 다 갖다 부을 뻔했다. 이 무슨 마법인지 처음부터 물을 많이 잡으면, 나중에 아무리 가루를 쏟아부어도 여전히 반죽이 질다. 그때 알았다. 엄마가 대단한 반죽 장인이었다는 걸. 그걸로 주사위도 반지도 공룡도 다 만들었는데 끓여낸 후에도 그들은 건재했으니까(그래서 맛없었지만).


완성된 반죽을 여러 명이 나눠 옹심이를 빚었다. 옹심이를 빚다 양 손바닥에 묻은 반죽이 마르면서 가려워 긁는 순간, 어릴 때의 예술혼이 되살아나 순간 주사위나 공룡을 만들 뻔했다.(여긴 반죽 책임제도 없는데 한번 해봐?) 동글동글 예쁘게 빚은 옹심이를 모아 놓으니 눈송이 같았다. 한쪽에서는 냄비에 팥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창밖에는 눈발이 여전히 흩날렸다. 첫눈 오는 날 눈송이를 빚었네, 하고 그제야 아침에 눈밭에 갖다 버린 낭만을 줍기 시작했다.


냄비가 탁탁 소리를 내며 표면에 용암 끓듯 커다란 거품이 생기면, 만들어둔 옹심이를 넣을 때다. 조금 기다렸다 옹심이가 위로 떠오르면 알맞게 익은 것이니 먹으면 된다. 펄펄 뜨겁게 김이 나는 팥죽 한 그릇퍼서는 옹심이를 얼른 입에 넣었다. 반죽이 좀 질었는지 입에 넣자마자 옹심이가 말 그대로 눈 녹듯 사라졌다. 아까까지 내리던 눈이 어느새 그쳐있었다. 금세 녹은 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레시피 귀퉁이에 조그맣게 감상을 적어 넣었다.


사실 옹심이 자체는 별 맛이 없다. 팥죽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옹심이를 둘러싼 기억과 먹어야 맛있다. 옹심이를 빚겠다고 동생이랑 마주 앉아 깔깔대던 웃음 맛이기도 하고, 녹아버린 눈 같은 맛이기도 한. 가끔 지난 레시피를 뒤적일 때가 있는데, 귀퉁이에 적힌 '너무 맛있어서 헛웃음이 나옴.' 이 문장을 보면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지.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웃고 있다.



*옹심이는 '새알'을 뜻하는 강원도 방언입니다만, 사찰요리에서는 새알을 먹지 않으므로 '옹심이'라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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