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Dec 12. 2019

믹서기를 고르는 법

손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하아)


믹서

설거지를 하고 나서 아무렇게나 쌓아두는 버릇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아끼던 도자기를 몇 장이나 깨트렸지만,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다 결국 믹서기까지 깨 먹었다(믹서기를 깨 먹은 후에도, 최근에 도자기 하나를 깨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믹서기는 밥솥, 오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내 인생의 3대 기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3대 기기가 죄다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니-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귀찮게 다른 모델을 알아보는 것보다는 쓰던 모델의 본체만 구할 수 있나 싶어 찾아보니 일치감치 단종된 제품. 그러고 보니 이 믹서기를 구입한 지 벌써 5년이 훌쩍 넘었다. 새로 사는 것 밖에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검색을 시작했다. 1인 가구인 데다 뭘 거창하게 가는 용도도 아니고 가볍게 바나나 갈아먹는 정도로만 사용해왔기 때문에, 몇만 원 선에서 구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검색을 하다 보니 어느새 20만 원을 웃도는 모델을 검색하고 있었다. 내 손을 꼭 잡고 결재의 문턱까지 나를 이끌었던 건 한 줄의 후기였는데, "녹즙이라고 여태 갈아 마셨던 것이 연못이라는 걸 알았다. 진정한 주스는 이런 것" 대충 이런 내용. 이 후기를 보고 나니 내가 그동안 좋다고 갈아 마셨던 건 바나나 똥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20만 원짜리 믹서기에 바나나와 우유를 갈면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가 나올 것도 같았다. 다행히 현재 직업과 수입이 없다는 사실이 결재 직전에 불현듯 떠올라 참사(?)를 막을 수 있었지만.


20만 원짜리에서 눈을 겨우 돌리고 다른 여러 가지를 살펴봤지만 20만 원짜리 믹서기의 핵심 기능인 '강력한 분쇄, 저소음'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믹서 mixer는 말 그대로 믹서일 뿐인데,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많은 믹서기가 있고 믹서기에는 왜 그렇게 많은 기능이 필요할까. 그리고 이 많은 기능이 왜 자꾸 나를 유혹하고 괴롭게 할까. 바나나 똥을 먹고 싶지 않다는 20만 원짜리 이상과, 2천 원짜리 바나나를 20만 원짜리 믹서에 갈아봤자 2천 원짜리 주스가 나온다는 냉랭한 현실감각이 맞섰다. 그 중간에서 며칠을 괴로워하다 결국 3만 원 선의 믹서기로 최종 합의를 봤다(그러고는 기능이 맘에 안 들어서 투덜거렸다).



사람

몇 날 며칠 믹서기를 고르면서, 그리고 결국 새로 산 믹서기 앞에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과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을 동시에 떠올리면서, 돈을 좀 더 쓰더라도 사고 싶은 걸 사야 했나라는 애매한 후회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 사람이다. 믹서기 하나 고르는데도 이 고생을 하는데, 사람은 어떻려나 싶은 거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명언도 있지만, 그놈이 그놈인걸 알려면 이놈 저놈 그놈 다 만나봐야 비로소 성립되는 공식이지 않은가. 믹서기야 2만 원, 3만 원, 여차하면 20만 원 짜리도 써볼 수 있지만 사람 만나는 게 어디 또 그런가.


어떻게 믹서기랑 사람이랑 같은 선에 놓나 싶다가도 선배의 직장 상사, 친구네 옆집 사는 총각, 아끼는 큰 아들 등 전혀 몰랐던 인물과 갑작스레 마주 앉아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 과연 내게 최적의 믹서기 사람이 있기는 있는 걸까?"라는 의문만 깊어졌다. 그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애당초 내게 뭘 갈고 싶은 의지가 전혀 없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쓸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모두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금사빠로 유명하던 내가! 툭하면 사랑에 빠져서 시름시름 앓아눕던 내가!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아서 고민하던 내가! 이렇게 황량할 정도로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가수 장범준이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라고 목청 높여 노래한 것처럼, 사랑은 정말 자연의 이치인 걸까? 나는 지금 자연의 이치에서 한발 비껴 나 있는 것뿐인 걸까? 과연 믹서기를 고르는 안목으로 사람을 골라도 되는 걸까? 요새 빠져있는 건 펭수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도 펭수를 보면서 우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