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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Nov 25. 2019

당신도 펭수를 보면서 우나요?

펭하! (이미지 출처: 펭수 유튜브)


지난주였나, 50대 후반쯤 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펭귄을 왜 그렇게 좋아해?"

"펭귄요?"

언제 적 뽀통령을 지금 말하시나 싶어 그녀를 빤히 바라봤는데, 너야말로 언제 적 뽀통령을 나한테 갖다 대는 거냐는 그녀의 당찬 눈빛이 나를 압도했다.

"펭수 몰라?"

"펭수요?"

"아니, 젊은 아가씨가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TV 좀 봐요."

"아, 집에 TV가 없어서..."


트렌드에 크게 관심 없긴 하지만, TV가 없다는 변명마저 왠지 쌍팔년도 같다는 생각에 머쓱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TV핑계를 댔나. 그나저나 펭수라... 어렴풋이 스치듯 펭수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친구들이 SNS에 곧잘 올리곤 하던 그 펭귄 같은데. 자려고 누워서 유튜브에 펭수를 검색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넘도록 잠 못 자고 펭수를 봤다.


과연 펭수의 인기는 뜨거웠다. 100만 구독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펭수 유튜브 계정에는 "내가 마흔인데 펭수에게 입덕 할 줄이야..." "서른네 살인데 펭수보면서 웃는다" 등의 펭수 입덕 간증 댓글과 더불어 온갖 정부 기관의 댓글이 줄줄 달려있었다. 외교부, 산림청, 환경부, 법제처... 인기만큼이나 펭수의 활동범위도 넓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악수하는 펭수, JTBC 토론 주제로 등장한 펭수, 가수 윤도현 씨와 더빙하는 펭수, 홍대에서 버스킹 하는 펭수, 그리고 최근에는 부산에서 팬사인회까지 가진 펭수. 팬사인회에서 한 아주머니가 펭수를 보고는 "제가 나이가 좀 많아서..."하고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펭수 좋아하면 이상하지요?"하고. 그 순간, 나도 펭수를 보고 울었다. 정확히는 펭수를 보고 우는 아주머니를 보고 울었다.



나이 많아도 마음 아픈 거 하나도 안 이상해요

작년 이맘때, 구미 사는 사촌동생이 서울에 놀러 와서는 내게 했던 말이 줄곧 남아있다.

"누나야, 서울 사람들은 진짜 빨리 걷는다."

그 뒤론 걸을 때마다 사촌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천천히 걸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되지를 않았다. 나는 늘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한시바삐 도착해야 했다. 늦지 않으려고 출근길에 뛰었고, 붐비는 지하철을 피해보려고 퇴근길에 역시 뛰었다. 퇴근 후 약속에 늦을까 봐 뛰었고, 약속이 늦어진 날이면 막차를 놓칠까 봐 뛰었다. 늦은 밤엔 불안하고 무서워서 집으로 뛰었고, 주말엔 누군가를 만나거나 뭔가를 배우기 위해 뛰었다. 얼마 전엔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는데, 내가 기다린 시간이 딱 20분이었다. 물론 20분이면 지각이지만, 나는 왜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던 걸까. 20분이면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을 자동적으로 나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간을 아낀 그만큼 삶이 더 넉넉해진 거면 상관없는데, '아꼈다'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시간을 아낀 딱 그만큼 마음의 용량도 함께 삭제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할 일이 많고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으니 덩달아 마음도 없고, 누군가와 나눠 쓸 시간과 마음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결국 펭수를 보며 웃고 또 우는 걸지도. 아주머니도 살아가며 마음이 아프고 힘든 날이 있었겠지. 그런데 주변에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펭수라도 찾아왔겠지. 펭수는 내 이야기를 가타부타 평가할 사람도 아니고, 나의 마음이 어떻든 말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인형도 아닌 '펭귄'이니까. 펭수는 내가 지금 어떻든 간에 힘내라고,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니까. 내게 필요한 건 그 한마디뿐이니까.



1인 1펭수가 필요합니다

펭수의 인기를 시샘하는 자들도 많다고 한다. 굳이 귀한 시간 들여가며 찾아보진 않았지만 펭수에게 악플을 달고, 펭수 탈을 덮어쓴 사람의 정체를 캐내려는 움직임도 있단다. 나는 잘 모르겠다. 펭수 탈을 덮어쓴 자의 신원을 알아내서 프로필을 조회하고 나면, 그러면 뭐? 뭐가 달라지는 거지. 펭수는 말 그대로 펭수일뿐인데.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따뜻한 말 한마디 듣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존재일 뿐인데. 펭수의 인기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메말라있고, 그래서 모두에게 펭수가 필요하다는 걸 반증하는 현상일 뿐인데.


차가운 직선과 축 늘어진 회색의 이미지로 대변되던 정부 기관들의 움직임도 너무 상큼하지 않나. 대만 가면 지하철 전면을 도배한 캐릭터나, 정부 공문에 들어있는 캐릭터가 너무 신선하고 귀여웠다. 정부 기관 자체가 이렇게 말랑하고 유연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꽤 살만하겠다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물론 하나로 열을 섣불리 평가할 순 없겠지만, 하나만 봐도 열을 알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펭수가 외교부를 찾아가 장관을 만나고, 각종 정부 기관이 펭수 영상에 댓글을 달며 콜라보를 요청한다. 한 국회의원은 외교부에 들어간 펭수의 신원 조회를 하지 않았다며 항의했다는데, 유머에는 유머로 받아칠 줄 아는 센스 좀 갖췄으면(그리고 영상 보면, 펭수 매니저가 펭수 여권 가져와서 신원 확인한다. 그건 '진짜'가 아니라며 길길이 날뛰겠지만, 펭수는 펭수일 뿐).


펭수 굿즈 제작 요청이 쇄도하고 있고, 펭수 부록을 주는 잡지는 70대 할머니도 사간단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지금 펭수 열풍이다. 다 큰 어른이, 다 늙은 노인이 펭귄 인형에 울고 웃는 게 이상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만큼 메말라 있다는 뜻이고, 다들 따뜻하고 웃음 넘치는 친구를 그리워한다는 증거다. 펭수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펭수를 보며 웃음과 힘을 받은 그만큼, 누군가의 펭수가 되어주자. 잘한다고,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사랑한다고 가만히 얘기해주자. 펭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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