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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13. 2019

중고서점 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내 방 어느 구역


고등학교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기껏 백화점에서 보기로 약속을 해놓고는 백화점 안에서 채 1분도 머무르지 못한 채-빈약하기 이루 비할 데 없는 어묵 한 꼬치가 3천 원이라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우리가 향한 곳은 시장 떡볶이집이었다. 이럴 거면 시장에서 볼 걸 그랬다는 말과 함께 그간의 안부를 늘어놓다가 친구에게 불쑥 물었다.

"야, 우리 수능 끝나고 샤넬 앞에서 사진 찍었던 거 기억나?"

"그래. 찍지 말라고 했었잖아."

"더럽고 치사해서... 근데 니는 샤넬 있어?"
"아니, 없지."

"우리는 십 년이 지나도록 샤넬 하나 없냐."

수능 끝나고 갈 곳 없던 수험생 두 마리가 샤넬 매장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었기로서니, 직원이 쫓아 나와서-그것도 인적 드문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사진 찍지 말라고 말했던 기억은 두고두고 곱씹고 있다. 그동안 부와 명예를 곱게 쌓아서 "흥, 세상에 가방이 샤넬 밖에 없니?"하고 보란 듯이 에르메스나 구찌 따위를 걸치고 다닐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니고 그냥 없다. 왜 없나, 곰곰 생각해볼 것도 없다. 죄다 책을 샀기 때문이다.



꿈이 뭐예요

늘 책만 보던 초딩이었던 내게, 어느 날 친구 하나가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나? 커서 뭐 되고 싶은 거 없는데.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이미지는, 밝은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과 커다란 책상에 책을 이만큼 쌓아놓고 읽는 내 모습이었다. 그 정도면 적당히 행복할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커서 책 많이 읽고 싶은데." (그때 내 꿈은 이 세상의 책을 다 읽는 것이었다.)

남들 일하는 훤한 대낮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말한다는 건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기 때문에, 그때는 그 꿈이 대단한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햇살이 잘 들어오는 밝고 환한 공간책만 보고 있어도 굶어 죽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상당한 재력가이거나 유산을 물려받거나 로또를 맞거나 해야 할 텐데. 앞의 두 가지는 애당초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고 믿고 기댈 것은 아, 정녕 로또뿐이더냐).


사람이 성장하면서 변하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몇 백장을 모을 정도로 좋아하던 스티커도-아끼면 똥 된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십 년 동안 고수하던 이상형도, 진열대에 놓인 상품 중 꼭 두 번째 걸 고르던 버릇도 모두 변했지만 책에 대한 애호는 여전했다. 책 취향도 희한하리만치 바뀌지 않았다. 책과 먼지가 동량의 비율로 가득한 중고서점을 뒤지는 일은,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독립영화관의 조악한 의자에 몸을 파묻는 것만큼 중요하고 은밀한 나의 기쁨이었다. 돈만 생기면 책을 샀기 때문에 집안 곳곳에 책이 넘쳐났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엄마에게 내 서재를 요구했는데, 엄마 역시 장서가인지라 두말 않고 방 하나 가득 책장을 짜주었다. 어느 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내 서재를 보고는 "아이고! 내가 번 돈이 다 여기 있구나!"하고 짧게 탄식했다.


문제는 혼자 서울에 살면서부터다. 서재를 업고 올라올 순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서재와 작별했지만, 책을 사는-제발 읽었으면-버릇은 여전해 좁은 원룸에도 책탑이 쌓였다. 이사의 무서움을 모르던 호기로운 햇병아리 시절이라 '책=짐'이라는 공식을 전혀 몰랐다. 이사를 할 때는 1톤 트럭에 책 박스를 가득 실어 고향집으로 보내야 했는데, 멀어지는 트럭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다음엔 책 안 사야지.'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꿈★은 이루어진다

중고서점이나 온라인 중고서점은 구하기 힘든 책을 찾을 때만 사용했는데, A사에서 전국에 중고서점을 아름답게 마련하면서 중고서점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었다. 동네 구멍가게를 죄다 잡아먹는 편의점처럼, 중고서점이 가진 고유의 풍경 자체가 사그라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A사 중고서점은 너무나 깔끔하고 편했다. 더 이상 먼지를 마셔가며 어디 처박혀있는지도 모를 책을 찾아 헤매는 수고-라고 쓰고 낭만이라고 읽어봅니다-를 하지 않아도 됐다.


엄마가 음식 할 때 괜히 주변에서 어정거리다 얻어먹는 음식이 더 맛있는 것처럼, 중고서점도 꼭 그랬다. 처음에는 원하는 책을 사러 갔지만, 나중에는 원하는 책이 없어도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재미가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나 싶고, 이렇게 괜찮은 책도 중고서점에 되파는 건가 싶고, 이런 주제로까지 책을 쓰나 싶었다(물론 이 공식은 내 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렇게 많은 책을 샀나 싶고, 이렇게 괜찮은 책도 사놓고 안 읽었나 싶고, 이런 주제의 책까지 다 샀나 싶었다). 게다가 A사 중고서점은 서울시 여기저기에 포진해 있기 때문에, 지역 명소나 맛집을 들리는 것처럼 순례하는 재미도 있었고.


책 구경이라면 굳이 중고서점말고 대형서점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나는 서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광화문 교보문고나 (조금 한적한) 영풍문고에 가면 내가 기대하는 서점 특유의 분위기는 없는 것 같다. 조용히 책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책만을 위한 공간도 아니다. 각종 문구류와 이런저런 샵들이 책과 함께 뒤섞인 느낌인 데다 사람도 워낙 많으니 여간해선 가지 않는다. 서점의 사람들은 뭔가 분주해 보인다.  


도서관에서 책 빌리는 것도 꺼리는 편인데, 정해진 기한 안에 읽고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시간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우스운 얘기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오면서, 같은 책을 사서 집으로 갔던 적도 더러 있다. 서점은 공간이 분주해서, 도서관은 시간이 분주해서 싫다는 이유는 실은 모두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저 중고서점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취향이 반영된 것일 수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 시대를 그렇게 일컬은 지도 족히 10년은 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서점 한편엔 늘 사람들이 있다. 서가 사이를 헤매며 원하는 책을 는 눈길이 있고, 책에 고개를 파묻은 채 책장을 고요히 넘기는 손끝이 있다. 중고서점엔 책과 책 읽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침묵과 여유로움이 있고, 내가 그 풍경의 일부라는 사실에 가끔 안도한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꾸었던 꿈이 조금은 이뤄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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