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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18. 2019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루하루 어설퍼보여도


결국 크면 대단한 게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거구나 싶다
결국 태어나서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당시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더라도 정말로 잘하는 일일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고...

정세랑 작가의 <이만큼 가까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주인공 '나'와 친구들은 십 대를 통과하며 어른이 되는데, '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결국에는 십 대 때 곧잘 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다. 툭하면 뭐든지 찍어대던 주인공은 영화판으로 갔고, 기가 막힌 솜씨로 뜨개질을 하던 친구는 여차 저차 해서 뜨개질을 통해 외국회사에 취업한다. '나'는 종종 과거를 돌아보며 위의 두 문장을, 그리고 비슷한 뉘앙스의 문장을 책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는다. 결국 사람은 애초에 하던 걸 어른이 되면 본격적으로 하게 될 뿐이라는 것, 태어나서 잘했던 일이 커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나는 이 문장들이 좋았다. 사실이면 좋겠지만, 사실이 아니라도 좋을 미지근한 위로.


주인공 '나'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영화 소품을 만드는 어른이 되었지만, 친구들과 뒤엉 걷고 뛰고 껴안고 뒹굴며 지나온 십 대의 터널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터널에 스며들던 빛의 색깔, 향기, 온도, 감촉, 습도... 작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친구가 잠깐 사귀었던 여자아이의 모공에 대한 기억까지 끌어안고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위의 두 문장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하던 것,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내는 일. 이게 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의 맨 처음

문장을 읽으면서 자연히 나의 애초를 더듬었다. 난 뭘 좋아했지? 뭘 잘했지? 곧잘 그림을 그렸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크레파스를 쥐고 도화지 위를 죽 그어 내릴 때의 매끄러운 감각이 아직까지 내 안에 있다. 내 그림은 자주 학교 복도에 걸렸고, 시市 대회에도 나간 적 있다. 사진 속의 어린 나는 엎드려 그림을 그리거나, 그린 그림을 자랑스럽게 들고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엄마가 미대 진학을 반대해서 미대생의 꿈을 접었고,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이었지만 학교에서도 곧잘 그림을 그렸다. 청탁(?)도 있어서 종종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학교 축제 때는 연극 배경을 담당했다. 강의실 가득 전지 몇 십장을 깔아놓고 밤새 그리고 색칠해도 재밌었다. 그러다가 시들해졌고 직장인이 되었고, 회사에선 가끔 친한 동료들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다들 물었다. "왜 이렇게 잘 그려요?" 그러면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 길은 역시 이거였나? 진짜 원했다면 미대고 뭐고 결국엔 하지 않았을까? 미대를 나와야 그림 그릴 수 있는 세상은 진즉에 끝났다. 웹툰 작가도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서 한편으론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그림을 잘 그렸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종종 유화를 그렸다. 내가 어른이 된 후에 문득 그림 그리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 엄마에게 화실에 나갈 것을 권유했는데,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가수 정준일 씨가 콘서트를 마치고 SNS에-지금은 찾아보니 없다- "음악을 좋아해요. 이게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하고 적었는데, 능동이 아닌 수동의 그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상태는, 어쩌면 능동이 아니라 수동일 수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내가 나서서 좋아한 것이 아니다. 좋아진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그 대상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나를 찾아와서 내 곁에 머물렀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걸 수도 있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엄마를 떠났다. 엄마가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그림을 떠난 것처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겨우 나의 애초를 더듬을 수 있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나'들은 좀 다른 것 같다. 애초에 하던 게 뭔지도, 인생에서 맨 처음 두각을 나타냈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이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잘하는 것도 없어."

만나는 친구마다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것 같아, 잘하는 게 없어... 그중에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그걸 찾는 사람은 되게 드물대, 행운아인 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못 찾고 사는 거."


근데 그걸 찾아도 계속할 수 있을까? 연말 시상식에선, 그해에 발견된-매해 있는 건 아니다-진흙 속의 진주가 진주처럼 동그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상소감을 밝힌다. 올해는 배우 이정은이 그랬다. 그녀는 나이 오십에야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단역으로는 돈이 안되니 사십 넘도록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고, 빚도 있고,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애초에 그걸 찾고 못 찾고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십까지, 혹은 그 너머서까지 그걸 좋아할 수 있을까? 그걸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그게 내 곁에 오래 머물러줄까? 나를 떠나지 않을까? 혹은 나를 떠나려고 할 때, 옷자락에 매달려서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초라해질 용기가 있을까? 그게 더 큰 문제인 거지.


애초에 좋아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어른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내던, 정말 잘할 수 있는 일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좋아하는 마음이 나를 떠날까 봐, 결국엔 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 불안해하고 염려하면서도, 깨질 것 같은 그 마음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서점의 서가에 꽂힌 책을 무심히 펼쳤다가 그 마음을 발견하고, 스크린을 가득 메운 배우의 흔들리는 뒷모습에서 그 마음을 발견하고, 빵 만드는 손끝에서 그 마음을 또 발견하고 나면, 그 마음을 용케 깨트리지 않고 살아온 그들에게 하염없이 고맙고, 또 하염없이 부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크면 애초에 하던걸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는 문장 앞에서,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하고 야트막한 긍정을 하고 싶어 진다. 우리 모두 결국은 태어나서 처음에 하던 걸 하게 된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문득 궁금하다. 그것은 나를 떠났을까, 아직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걸까. 아직 머물러 있다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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