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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묵혀둔 봄을 꺼냅니다

by 꽃반지
취나물 볶음


"12월 첫 수업입니다! 12월을 어떤 걸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메뉴로 결정했어요. 겨울이면 묵나물이 맛있어지거든요. 풀 삶는 향기가 근사하지요?"

바깥의 추위 때문인지 냄비의 열기 때문인지, 두 볼이 여느 때보다 빨개진 스님이 함빡 웃음으로 여는 12월의 아침.



풀 삶는 겨울

매해 겨울이면 묵나물을 삶는다. 시래기도 삶고, 취나물도 삶고, 고사리도 삶고, 토란대도 폭폭 삶는다. 사찰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계절이 겨울이니, 묵나물의 참맛을 안 것도 겨울이다. '묵나물'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도토리묵 말린 것을 나물처럼 무쳐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실제로 전라도에 그런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도토리묵에 간장만 끼얹어 호로록 떠먹어도 맛있지만, 말린 묵을 불려 삶은 것도 꼬들꼬들한 식감이 근사하기 때문에 그런 음식을 가리켜 으레 묵나물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겨울이면 스님들이 묵나물, 묵나물 하시기에 사전을 찾아보니 '묵은 나물'이라는 뜻이었다. 말려서 잘 갈무리해둔 묵은 나물이 바로 묵나물이었다. 말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보니, 그러면 '나물'은 대체 뭔가 싶어 다시 사전을 찾았다. 미나리도, 시금치도, 달래도, 머위도 다 나물인 건 알겠는데 나물의 뜻은 뭘까.

나물
[명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이라니. 그러니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잎사귀면 죄다 나물인 셈이었다. 기린처럼 목을 쭉 빼고 나뭇잎을 우적우적 씹어먹거나, 토끼처럼 땅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는 사람의 모습은 왠지 순하다. 늘 먹어왔던 나물이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이라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찡해서 종이에 옮겨두었다.


온갖 푸른 것들이 돋아나는 봄과 여름. 풀과 잎사귀를 먹는 사람이, 푸른 것들을 실컷 먹다가 푸른 것들이 깡그리 사라지는 겨울이 오면, 그때 꺼내먹으려고 나물을 말려두었을 것이다. 처음에 묵나물은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푸른 것들이 실컷 돋아날 계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푸른 것들의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오래된 풀을 꺼내 삶는다. 풀 삶는 향기를 맡으면서, 솥 곁에 쭈그리고 앉아 온기를 느끼면서. 그렇다면 묵나물은 너무나 낭만적이다.



올 겨울은 따뜻할 거예요

시래기든, 취나물이든 묵나물은 오래 불려야 한다. 먹기 전날 하룻밤 찬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다. 삶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솥에 물을 붓고는 묵나물을 넣어 20분가량 삶는데, 솥만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제법 길어서 '아니, 그렇게 오래 불렸는데도 이렇게 오래 삶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게다가 삶은 후에도 불을 끄고 10분가량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니, 나물 삶는 시간 동안 다른 요리를 하는 편이 좋다.


뜸 들이기까지 마쳤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은 나물은 물기를 꼭 짜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 썰어서 밑간을 한 다음 볶는다. 볶을 때도 불 조절을 잘해야 한다. 덜 볶으면 씹었을 때 입안에서 질깃거리고, 너무 볶으면 잎이 깨져서 텁텁해진다. 시래기를 삶을 경우에는 삶고 나서 겉껍질을 한번 벗겨내는 공정까지 필요하니, 묵나물 한번 먹으려면 손이 이만저만 가는 게 아니다.


무심히 나물을 삶으며, 나물 삶는 향기를 맡으며, 따뜻한 냄비 곁에 서서 나물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묵나물이 제 깊숙이 감추고 있는 푸른 계절을 꺼내먹기가 녹록지 않다. 이렇게 물도 많이 주고, 온기도 듬뿍 주는 과정이 마치 봄에 뾰족하게 돋아난 싹이 자라는 과정과 비슷하다. 싹이 푸르게 자라려면 물도 듬뿍 먹고, 햇살도 듬뿍 받아야 하는 것처럼 묵나물도 새싹 다루듯 살살 달래줘야 하는 거구나. 손 많이 간다고 투덜거리는 내게, 묵나물이 새침한 목소리로 "어디 봄 한번 꺼내먹기가 쉬운 줄 알았어?"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볶아낸 묵나물은 향긋하고 깊다. 따뜻하다. 그러니까 추운 날에는 묵혀둔 봄을 꺼내자. 묵나물을 꼭꼭 씹다 보면, 어느새 푸른 계절이 이만큼 다가와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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