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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Dec 03. 2019

#33. 믿고 따블로 가!


사찰요리가 오신채를 배제하다 보니, 김치는 불가능할 거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찰에서도 김치를 담근다. 당연히 파, 마늘이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멸치액젓이니 새우젓이니 하는 젓갈류도 쓰지 않는다. 사찰요리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배우고 싶은 나지만, 김치만은 예외였다. 매해 겨울마다 열리는 사찰식 김치 수업에는 영 관심이 안 갔다. 힘들게 김치 담는 엄마를 줄곧 봐와서 그런지, 김치는'몸이 고생하는 음식'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딱 박혀있었다. 게다가 김치의 가장 기본인 마늘, 파도 안 넣고 젓갈도 안 넣은 김치 아닌가. 밍밍해서 무슨 맛으로 먹는담. "사찰식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데!" 하는 주변의 말에도 불구하고 "김치가 다 거기서 거기죠."하고 넘겼다. 평소에도 김치를 찾는 편이 아니었고, 엄마가 가끔 보내주는 김치는 봉지째 그대로 냉장고로 직행해 냉장고 속 풍경이 되곤 했다. 엄마가 보내준 김치도 안 먹는데, 고생하면서 먹지도 않을 김치를 담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런 내가 사찰식 김치에 빠지게 된 이유는 물김치 때문이었다. 이게 김치에 들어간다고? 싶을 정도로 희한한 재료로 물김치를 담았다. 토마토, 복숭아, 수박으로 김치를 담았는데 이게 또 놀랄 만큼 맛있었다(복숭아 물김치 맛이 상상이 되십니까?) 평소엔 좋아하지 않던 물김치 맛을 보고 나니, 비로소 김장 김치도 궁금해졌다. 김장 김치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에 앞서 스님이 작년에 담은 김치 맛을 보여주셨다. 고춧가루, 소금, 그리고 간장만 들어간 게 맛있다고? 의심을 가득 품은 채, 김치 한쪽을 입에 넣었더니 개운하고 시원한 맛이 났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수업에 참가한 누군가가 "아무것도 안 넣었는데 어떻게 맛있죠?"하고 물었다. 스님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넣었으니까 맛있습니다."


재료도, 공정도 정말 심플 그 자체. 대야마다 한 가득 양념을 만들 필요도, 번거롭게 무슨 젓갈이니 굴이니 배니 하는 속재료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배추와 무는 소금물에 담가 숨을 죽이고, 고춧가루와 소금, 간장을 비율에 맞게 섞어 양념을 만들면 끝(물론 스님마다 노하우가 다르고 조금씩 들어가는 재료가 다르지만, 기본적인 방법은 같습니다). 김치가 이렇게 쉬운 거였나? 이렇게 쉬운데 그렇게 맛있다고? 우습게도 그날 담근 김치는 무슨 맛인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집에 가서 맛만 본다고 하나 꺼내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단숨에 다 먹어버렸으니까. '아무것도 안 넣었으니까 맛있다'는 스님의 말을 혀로 이해했다.



믿으니까

'아무것도 안 넣었으니까 맛있다'는 말을 김치 씹듯 우물우물 곱씹어보면 '얼마나 재료를 믿으면 그래요?'하고 되묻고 싶어 진다. 향을 돋워줄 파와 마늘도, 감칠맛을 더해줄 젓갈도 없다. 사찰식 김치에서 배추는 배추 맛을 내고, 무는 무 맛을 낼 뿐이다. 소금은 시원한 맛을 내고, 간장은 간을 더하고, 고춧가루는 매운맛을 낸다. 이게 전부일뿐이라서, 오히려 이 단순함이 대범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토록 오래 김치를 먹어왔으면서 김치가 맛있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익지도 않은 김치 한통을 홀랑 다 먹어버리다니. 어쩌면 이게 진짜 김치 맛 아닐까.


요즘 이력서를 쓰고 있는데, 의외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소개'다. 누군가 내게 사과에 대해 물으면 빨갛다, 향이 달다, 비타민 C가 풍부하다 등 척척 대답할 수 있는데, "넌 누구니?"하고 물으면 말문이 꾹 막혔다. 처음엔 거리 탓을 했다. 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거야, 하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나를 못 믿는 거였다. 나의 이런 부분을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런 부분도 받아들여질까? 하고. 결국 나라는 사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적당히 부풀려지고 다듬어진 나가 탄생한다. 물론 취업 시장에서 장점을 살리고 매력을 어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날것의 나를 보여줄 하등의 이유는 전혀 없지만, 이력서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날 때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듣기 편한 말투와 단어를 고르고, 가벼운 미소를 자동 장착하게 된다. 펭수처럼 "나는 내가 이상형입니다!"하고 까랑까랑하게 말할 순 없지만, 뭔가를 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나도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설마 배추보다, 무보다 못한 인간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못해도 배추나 무 정도의 매력은 있지 않을까.


김치 한 통을 단숨에 다 먹고는 또 먹고 싶어서, 결국 그다음 날 배추와 무를 샀다. 어설프지만 배추와 무를 절이고 풀을 쑤고, 양념을 만들어 발랐다. 해마다 엄마한테 "제발 사 드세요!"라고 이야기하던 내가, 이제는 해마다 김치를 담겠구나 싶어 김치를 담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다. 내 생애 첫 김치, 맛있을지 맛없을지는 잘 모른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배추와 무를 믿고 가는 수밖에.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인생도, 잘 모르지만 믿고 갈 수밖에 없다. 나를 믿고 최선을 다할 뿐.


까짓 거, 믿고 따블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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