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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24. 2020

체험판이라서 다행이야

책상 위 달력.


문 크리스탈 파워☆

태어나보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고작 몇 주 간격을 두고 두 번이나 외치는 민족이다. 새해가 되면 커다란 환희에 젖어 온갖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담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죄다 꺼내 주고 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겐, 다시 한번 그 말을 건네기가 참 뻘쭘하다. 이건 마치 노래방에서 애창곡을 열창한 뒤 모두의 뜨거운 박수를 실컷 받았는데, 다시 한번 마이크를 잡고 같은 노래를 부르며 아까와 같은 온도와 농도의 박수를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어릴 땐 새해 복 받으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고 듣는 게 참 이상했다. 원래 아주 소중한 말은 딱 한 번만 하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아주 소중한 건데 두 번씩 하고 다니니 소중함이 딱 50퍼센트 휘발되는 것 같았다. 프러포즈를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하는 꼴이다. 온 세상이 숫자를 거꾸로 세며 해피 뉴 이어를 외치는 순간, 행여 새해 복을 못 챙겨 받은 이들에게 다시 챙겨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50이 30으로 좀 줄어들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게 다 양력, 음력 때문이다. 달력에 빤히 새겨진 숫자를 무시하고 굳이 쓰여있지도 않은, 혹은 커다란 숫자 아래 아주 작게 쓰여있는, 그래서 안 그래도 좁은 달력을 꽤 지저분하게 만드는 음력을 굳이 왜 챙기는 건지. 한 해 중 음력이 필요한 때는 딱 세 번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맞는 새해, 아버지 생일, 어머니 생일. 715811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음력 생일로, 아주 어릴 때부터 늘 공식처럼 입 안에서 우물우물거리는 숫자다. 어머니의 주민등록 숫자가 815이기 때문에, 711815였나 가끔 헷갈리곤 했다. 부모님의 생일이 달력의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면, 그 쪼끄만 숫자에는 일찌감치 관심도 없었을 텐데. 달력에 부모님의 생일을 동그라미 치면서, 내 생일도 이윽고 어른이 되면 달력의 큰 숫자에서 작은 숫자로 이사 가는 건가 싶었다. 몇 살부터 어른이 되는 걸까,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를 줄곧 궁금해하다 정신 차리니 어느새 빼도 박도 못하는 어른이었지만. 해마다 다이어리를 사면 가장 먼저-실은 내 생일 다음으로-부모님의 생일을 새겨 넣는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부모님의 생일을 아직까지-아마 영원히-힘들어하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일러주곤 한다.


내게 음력은 괜히 침침하고 축축했다. 햇볕이 한 줌도 들지 않는 그늘에 앉아 물에 푹 젖어 잘 넘어가지도 않는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 한자'음陰'의 뜻을 따져봐도 그늘, 겨울, 저승, 뒷면, 흐린 날과 같이 온통 춥고 어둡고 스산하기만 했다. '음력'이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들던, 노래방에서 같은 노래를 두 번 부르고 열화와 같은 박수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그 노래방은 왠지 반지하에 있어 해는 들지 않고 소파엔 곰팡이가 벽지 꽃무늬처럼 화사하게 피어있을 것만 같은, 내 이마에서 흘러내린 커다란 땀방울이 가뜩이나 축축한 노래방의 공기에 촘촘한 밀도를 더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은 5년 전의 대만 여행에서 비로소 치유되었다. 음력 새해 하루 전이었고, 숙소에서 마주친 홍콩 남자애가 나에게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lunar new year를 한국말로 어떻게 발음하냐고. 아, 그랬지. 음력은 달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달력이었지. 비로소 '음陰'이 가만히 품고 있는 달이 보였다. 이마에 같은 달을 새기고 있다고 해도 포청천과 세일러문이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동안 나의 음력이 포청천이었다면 'lunar new year'라는 마법의 주문을 통해 비로소 세일러문으로 거듭났다. 문 크리스탈 파워!


(이마에 달을 새긴 동양의 두 남녀. 세일러문은 본인의 정체를 주변에 숨기고 살아간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주제가도 속여서 미안하다는 사과로 시작한다. 반면 판관 포청천은 죄인들을 잡아다 앞에 무릎을 꿇리고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며 진실을 캐내는 게 일이다.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잡아떼는 죄인은 개작두 행인데, 여기가 포청천의 킬링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가 죄인을 향해 종이를 휙 던지며 마침내 "개작두를 대령하라!"하고 외치면 다렸다는 듯 온갖 악기가 울린다. 세일러문이 포청천을 만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세일러문 :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내 맘이 들린다면 넌 어떨까  포청천 : 개작두를 대령하라 (솔직하지 못한 너에겐 개작두♥)



새해는 구정부터 

새해 계획을 1월 2일에 이미 포기했다.


여느 날과 같은 날인 줄 알면서 '새해'라는 이름만으로 괜히 혼자 들뜨곤 하는 나는 새해 성애자다. 해마다 다이어리를 몇 권이나 사고, 새해를 맞기 며칠 전부터 '올해는 다르리라'하고 공들여 계획표를 짠다(그리고 작년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목표가 똑같아서 흠칫 놀란다). 양력 1월 1일을 맞으며 내가 짠 2020년의 계획-이라고 쓰고 2016, 2017, 2018, 2019년과 다를 바 없는-은 이렇다.

1. 운동하기

2. 하루에 한 편 글쓰기

3. 하루에 한 시간씩 외국어에 투자하기

4. 밤 12시 전에 자기


1번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월 2일에 이미 포기했다. 개똥 같은 계획이었다. 2번 역시 개똥 같은 계획이었다. 3번을 이루기 위해 무려 레벨테스트까지 거쳐 영어 회화반에 등록했으나, 회화반 사람들이 수업 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앉아있을 뿐이라 나와 대화를 나눠줄 상대가 없다. 이런 난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서 다음 달엔 등록하지 않을 예정. 1번, 2번은 이미 태생이 개똥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4번은 예상 밖의 개똥이다.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난 새로운 등장인물과 전화로 수다를 떠느라 툭하면 자정을 넘기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개똥을 빚게 됐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네, 참 아름다운 개똥이었습니다".


몇 해전 이맘때쯤, 아마도 신문에서 붕가붕가레코드 대표의 칼럼을 읽었다. 요는 '도라지인 줄 알고 캤던 장기하가 알고 보니 산삼이었더라'라는 내용. 어찌어찌 흘러 글의 말미에 그는 '새해는 구정부터다'라는, 내 인생 2대 명언-또 다른 하나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열쇠는 제자리에 두라'는 말이다. 지금은 번호키를 쓰지만 열쇠를 가지고 다닐 때는 열쇠를 찾느라 정말로 애를 많이 먹었다. 안경 쓰고서 안경 찾기와 비슷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잘 보이니까 샅샅이 찾아 헤맨다-중 하나를 남겼다. 그 해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개똥을 한바탕 빚었고, 벌써 실패한 계획에 씁쓸해하던 참이었다. 새해는 구정부터라는 그 말이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물론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된 것처럼 어느새 연말이었고, 이룬 건 별로 없지만.


오늘은 음력으로 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새해를 하루 앞둔 새해 성해자인 나는, 다시 한번의 기회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새해가 너무 좋고 소중해 제대로 쓰지 못할까봐 새해가 두 번 있는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력 새해는 체험판이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본다. 본품은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이다. 운동은 언제쯤 하게 될지, 하루에 한편 글 쓰기가 과연 가능할지, 영어학원의 언니와  친해졌는데 그녀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해야 할지, 웹툰과 유튜브와 전화 통화를 모두 물리치고 자정 전에 자는 게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다. 실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다 싶기도 하다. 새롭게 맡은 일을 잘 해내 보려 애쓰고 있고, 술도 커피도 담배도 안 하니 웹툰과 유튜브와 전화 통화는 괜찮 않나 싶고, 확실히 지난날의 나보다는 좀 더 걷고 있고, 내가 시간과 마음을 들여 해온 일이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어제 잠들기 전, 나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짧은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 그러고 보면 내 주변엔 늘 나에게 아낌없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 마음을 잘 기억하고 되돌려주면서 살아가는 내가 돼야지. 다시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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