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8. 오! 새로워라 처음 보는 내 모습

by 꽃반지
삼색두부


최근 배운 요리 중에 삼색두부찜이 있다.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두부를 으깬 후, 비트 가루나 녹차가루 따위를 살살 더해 색을 입혀 한 김 쪄내면 된다. 말간 두부가 분홍이나 연두로 재탄생하니, 입으로 먹기 전에 눈이 먼저 홀랑 먹는다.

색을 바꾼 두부 요리를 내면, 요리 베테랑인 사람도 깜짝 놀라 묻는다. 이게 정말 두부니, 어떻게 만들었니, 무슨 맛이니...(무슨 맛이긴요. 두부 맛이죠). 별다른 짓을 안 했는데도 근사해진 두부요리를 보고 있으니 괜히 부럽다. 나를 색다른 존재로 바꿔줄 내 인생의 비트 가루는 어딨는지 더듬더듬 찾게 된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인생 하니까 말인데, 요즘 읽고 있는 책은 85세 번역가 할아버지가 쓴 책이다. 책 제목과 표지만 봤다면 서점에서 분명 휙 하고 지나쳤을 법한데-<취미로 직업을 삼다>라는 제목이다. 취미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다 보니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겪어보지 못한 산통을 겪을 수 때문에, 이런 제목의 책은 되도록 멀리하는 편이다. 이렇게나 옹졸하다-다행히 문장을 먼저 만나게 되어 냉큼 구매했다. 예전에 참 잘 읽은 책도 같은 작가의 번역서인 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젊은 번역가의 것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시원하고 날렵한 문장이었다.


제목처럼 어느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틈틈이 외국어를 갖고 놀며 살살 번역을 했는데, 그게 쌓여 80 인생 돌아보니 어느새 번역가가 되어있더라... 는 내용이 아니다. 일제시대 태어나 30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집도 날리고 '정말로' 거리에 나앉게 되다 보니, 남들 실버타운 들어가 안마의자에 누워있을 나이에 일할 의자 하나 얻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의 치밀하고 치열한 생존기다.


팩트만 놓고 보면, 일제시대에 태어났다고? 일본어 잘하겠네. 30년간 기자 했다고? 글 잘 쓰겠네. 일본어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일본 책 번역하는 게 뭐 어려워? 싶다.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보고 싶은' 팩트다. 내가 몇 개월간 일을 쉴 때, 통장 잔고를 외우고 다녔다. 걱정되는 마음에 하루에 몇 번씩 들여다봤으니 저절로 외워졌다. 젊은 나도 그랬는데, 하물며 70세가 넘어 돈벌이를 해야 하는 그 상황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가 갖고 있는 재주를 다 쥐어짜 털어보니 그게 일본어와 글쓰기 실력이었다. 번역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두부에 색을 입힐 때, 반듯하게 모난 두부에 비트 가루 쿡 찍는다고 분홍색 두부가 되진 않는다. 낱낱이 두부를 으깨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렇다. 나 글밥 좀 먹었는데? 나 70 넘었는데? 40살이 명예퇴직인 이 사회에서 누가 70살 영감탱이한테 일자리를 주는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물기가 말라 가는 쪼글쪼글한 두부 한모 일뿐이다. 또래의 늙은이들이 애써 주름을 부정하면서, 품위유지랍시고 마지막 남은 모서리에 갖은 힘을 주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아예 자기를 완전히 으깨고 뭉갰다. 번역이라는 색을 입히려고.


젊은 애들 배우는 워드를 배우고, 출판시장을 분석해 틈새시장을 찾아내고, 출판사마다 전화를 걸어 일거리 좀 달라고 사정했다. 70넘은 노인, 그것도 생짜를 누가 믿고 덜컥 일을 줄까. 그렇다면 좋은 번역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가 번역을 위해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은 하루에 꼬박 여덟 시간. 할아버지의 번역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 내가 당연히 젊은 사람의 번역으로 생각할 정도로 시원한 문장은, 이렇게나 뜨거운 엉덩이에서 나온 거였다. 잘게 으깬 두부를 비트 가루와 잘 섞은 뒤 뜨겁게 쪄내야 색이 잘 올라오는 것처럼, 그도 생전 처음 만나는 번역과 뒤엉키는 그 질긴 시간을 매일 견뎠다.



그대 만난 후로 난 새사람이 됐어요

'... 지금의 나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못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위에 언급한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두부더러 무지개떡이 되라는 게 말이 아니다. 으깨고, 가루를 섞고 찌고 별짓을 다해봐도 두부는 두부일 뿐이다. 70세 할아버지가 본인의 노화된 신체와 타고나지 못한 감각을 애써 무시한 채, 비보이를 꿈꾸며 경로당 마룻바닥에 온몸을 내던졌다면 진작에 무릎이 으스러졌을 거다. 지금의 내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도, 배려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건 지금의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거다.


고유의 나, 지금 내가 가진 나를 잘 으깨고 이리저리 시도를 하다 보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애타게 찾아 헤매었던 새로운 가능성이란 실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그렇지만 나 자신도 몰랐던 가능성일 경우가 크다. 시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으깨지고, 뒤섞이고, 새로운 것들과 엎치락뒤치락하려면 만만찮게 힘이 들 거다. 그렇지만 나를 믿고 그냥 가보는 거다. 그건 나만이 꺼낼 수 있기에.


삼색두부찜을 보며 이게 두부라니! 하고 감탄하는 것처럼, 85세 노인의 문장 속에 35세 청년이 살고 있는 것처럼. 인생 잘 모르지만, 아마 그게 인생이지 싶다. 두부도, 70세 할아버지도 썩 잘 해냈는데 나라도 못할게 뭐겠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7. 거칠거칠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