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에도 적혀있지 않은 스님들의 깨알 팁이 대방출될 때가 있다. 대체할 수 있는 재료, 같은 재료를 가지고 응용할 수 있는 색다른 요리법, 재료를 다루는 스님만의 노하우까지... 그야말로 창고 대개방이다. 창고 대개방의 승자는 빠른 손놀림을 겸비한 자! 이런 날엔 한 손으로는 주걱을 들고 부지런히 재료를 볶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받아 적기 바쁘다. 주부 짬 2,30년의 베테랑들은 쏟아지는 깨알 팁에도 '아하, 으흠' 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지만, 나는 필기가 없으면 복기가 어려운 초보이기 때문에 깨알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줍는다.
썩 어울릴 것 같지 않거나 처음 듣는 희한한 조합인데도, 스님이 일러준 대로 해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게 되는 일이 많았다. 먹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니... 이런 맛을 여태 혼자만 알고 계셨나요!" 하고 부러움과 애석함이 뒤섞인 외마디를 허공에 뱉곤 했다. 스님들의 깨알팁이 대방출될 때마다 그 기발함과 다양함에 놀랐지만, 놀라운 가운데 제일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스님은 대체 이걸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도대체 이 조합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발상의 근원, 창조의 원천이 무척 궁금하고 부러웠다.
보이차 밥
내게 작은 놀라움과 큰 기쁨을 선사한 메뉴 중 하나가 바로 보이차 밥이다. 찻물에 버섯과 은행, 밤을 넣고 보이차 밥을 짓는다. 보이차 밥이라니?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 유학할 때 별 희한한 음식을 다 구경했지만, 보이차에 밥을 말아먹는 건 못 봤다. 일본에 녹차에 밥을 말아먹는 오차즈케라는 메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중국에선 왜 보이차에 밥을 안 말아먹을까? 세상 맛있는 건 싹 다 찾아먹는 중국인들인데 보이차에 밥을 안 마는 걸 봐서 맛없는 게 아닐까. 밥을 지으면서 결과물이 내심 걱정됐지만, 냄비 바닥을 싹싹 긁어 누룽지까지 해먹을 정도로 밥맛이 좋았다.
뭐, 보이차 밥뿐인가. 어느 동네면 어느 식당! 자타공인 나름 발 넓은 맛집 애호가인데도,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메뉴들이 수업마다 속속 등장했다. 봄 향기 만두, 오미자 동치미국수, 묵은지 잡채... 이름만 들어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그대로 느껴지는 메뉴들. 저 근사한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내 마음을 들켰는지 하루는 스님이 웃으며 이런 말을 하셨다.
"뭔 사찰요리에서 이런 거까지 다 먹나 싶죠? 사실 별거 없어요. 이런저런 음식 만들고 나면 재료가 남는데, 안 버리려고 궁리를 하다 보니 이런 메뉴도 만들어졌네요."
보이차 밥도 찻잎을 우리고 남은 찌꺼기가 버리기 아까우니, 모아서 우려내 밥물에라도 써보자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우리 속담에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속담의 참뜻을 불과 몇 년 전에 겨우 알게 됐는데, 꽤 오랫동안 이 속담을 '시장에 가면 반찬(먹을 것)이 많다'라는 뜻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인프라가 좋아야 결과물도 좋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이 속담을 영어로 Market이 아니라 Hunger라고 번역해놓은 걸 우연히 보고서야 제대로 알았다. 먹을 게 없으니 뭐든 주워 먹어도 맛있다는 뜻이군. 시장을 내 식대로 해석한 데서 생겨난 오해지만, 오해한 김에 좀 더 나가자면 '시장(Hunger)'이야말로 '시장(Market)'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찰요리는 재료가 퍽 제한적이다. 쓰이는 양념도 끽해야 소금, 간장, 설탕 정도. 그런데 이렇게 단출한 것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참 잘도 만든다. 시장(Hunger)에서 빚어진 시장(Market)이다. 부족해서 도리어 넉넉한 이 아이러니.
시장을 시장으로 만든 누군가의 빛나는 아이디어는 당연히 머리에서 나온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구나. 누군가가 "사찰요리에 한 획을 그어보겠다!"하고 미스터 초밥왕같이 비장한 눈빛과 자세로 요리를 만들었을 것 같진 않다(물론 그것도 멋진 일이지만). 그저 사찰요리의 기본 정신에 충실한 것 아니었을까. 재료를 알뜰히 요리해야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허투루 버리지 않겠다, 이 계절에 나는 것들을 접시에 듬뿍 담겠다 하고.
새롭고 기발한 메뉴를 만나면 여전히 반갑고 놀랍다. 그런데 이제는 창조성보다는, 그 안에 깃든 마음이 부럽다. 어떤 마음이길래 이 멋진 걸 만들었나 싶다. 좀 얻을 수 있으면 그 마음을 한 숟갈만 푹 떠서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