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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08. 2020

김밥적 순간



이건 김밥적 순간이다!

회사로 향하는 지하통로에 테이블 두 개 정도 놓인 자그마한 김밥집이 하나 있다. 출근시간 무렵이면 가게 밖에 김밥이나 샐러드를 놓아두고 파는데, 제법 인기 있는 편이라 점심때 가면 다 팔리고 없다. 처음 몇 번 허탕을 친 후론,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아침 출근길에 일찌감치 김밥이나 샐러드를 산다. 너무나 고퀄리티의 엄마표 김밥을 먹고 자란 탓에 밖에서 파는 김밥을 사 먹을 때마다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집 김밥은 꽤 만족스러워 자주 들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사장님이 알아볼 정도로 얼굴을 텄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평소처럼 출근길에 김밥 한 줄 사려고 했는데, 사장님이 제육 김밥밖에 없다고 한다. 제육 김밥 말고 그냥 김밥 달라고 했더니 당근이 없어서 안된다. 출근 시간에 쫓겨 당근 없어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끝끝내 안된다는 사장님을 보며, 이 무슨 '방깎노'-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을 내 맘대로 줄여 부르는 말. 방망이 하나 사려던 주인공은 차 시간에 늦어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방망이 파는 노인은 세월아 네월아 방망이만 깎더라는 내용입니다-인가 싶었고, 지각할 순 없으니 김밥을 포기하고 출근했다.

그리고.

사무실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자마자 다시 김밥집으로 향했다.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의지는 왜 위장에게만 주어진 걸까. 위장은 말한다. 내 삶은... 꼬르륵... 원하는 것으로... 꼬르륵... 채우겠어.
“사장님, 저 아까 출근시간 때문에 그냥 갔는데 당근 없어도 되니까 김밥 주세요.”
“안돼요. 당근 없으면 맛없어요.”
“사장님 김밥은 당근 없어도 맛있어요!”
“당근 없으면 썰었을 때 안 예쁘단 말이에요!”

결국 당근 없는 빈자리를 오이로 대체하기로 합의(?)를 봤다. 이 바쁜 아침에 김밥 한 줄 놓고 사장님이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니, 문득 웃음이 픽 났다. 이게 바로 카피라이터 박웅현이 말한 '호떡적 순간', 카피라이터 유병욱이 말한 '깻잎적 순간'이 아닌가.


박웅현의 저서 <여덟 단어>에는 그가 자주 들르던 동네 호떡집 사장님 이야기가, 유병욱의 <생각의 기쁨>에는 일본 오사카 여행에서 만난 깻잎 튀기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두 저자가 하는 얘기는 같다.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기쁨과 자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 다른 책에서도 몇 번이나 읽은 말이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느니, 장인정신을 가지라느니... 숱하게 읽고 숱하게 스친 말들, 보고도 못 본 순간들. 그런 내게도 '김밥적 순간'이 온 거다.'당근 없으면 맛없다'는 사장님 말은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썰었을 때 안 예쁘다'는 말 때문에 이토록 무심했던 나도 바로 알아차렸다. 이건 김밥적 순간이다!



레디, 겟 셋, 고!

기다리는 동안 먹고 있으라며 사장님이 내어주신, 메뉴에도 없는 시금치 아보카도 김밥 하나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김밥 싸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테이블 두 개 남짓 들어가는 지하 매장, 당근 없어도 되니까 김밥 한 줄 빨리 말아달라는 손님. 내가 주인이라면 어땠을까. 당근 없어도 괜찮댔으니 있는 재료 대충 넣어 한 줄 뚝딱 말아줬을 텐데.


처음 이 집에서 별 기대 없이 김밥 한 줄 사고는 점심때 포장을 끌렀을 때 '참 예쁘게도 쌌네'하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았는데, 그건 내가 유독 감상적이라서 김밥 속 들여다보며 봄날 벚꽃 보듯 기쁨에 젖었던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한 줄 휙 말아서 파는 김밥이 아니라, 썰었을 때도 색 조화가 가지런한 예쁜 김밥을 만들고 싶은 마음의 결과였구나.


갈팡질팡하던 요즘이었다. 새로 맡은 업무가 나에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이 일을 앞으로 계속할 자신도 없어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 밤마다 절망에 정말을 보태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앞에는 김밥 한 줄에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진짜로 있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어. 이렇게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 교과서에 나온 '방깎노'를 아무리 읽어도 톱밥만큼의 감흥도 없더니, 이젠 내가 좀 어른이 된 건지 아니면 나는 확실히 2D보단 3D체질인지 어쩐 건지, 김밥 한 줄에 나의 온 마음이 바다에서 막 건진 돌김처럼 울렁거렸다. 앞서 말한 두 저자가 오백 원짜리 호떡과 깻잎 튀김 이야기를 굳이 책에 실은 이유도, 어쩌면 그 순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장님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김밥적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순간 몸을 휙 돌려 "완성!"이라고 말하며 내게 김밥 한 줄을 내밀었다. 손에 받아 쥐니 따끈따끈한 게 꼭 이어달리기할 때 바톤을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가게를 나왔지만, 이어달리기할 때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한 손엔 김밥을 쥐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얹었다. 이토록 따끈한 마음을 건네받았으니, 나도 저렇게 열심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않겠나 싶었다. 나를, 현재를, 내게 주어진 삶을.


김밥 한 줄을 꼭 쥐고, 두근두근. 다시 출발선에 서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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