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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04. 2020

그러게 말이에요



지나온 시간을 되감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어떤 장면이 하나쯤 있을 겁니다. 영화 제목을 들으면 단박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장면처럼요.


아마 일곱 살 쯤이었나. 학교를 다녀와서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문득 선득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 시계를 보니 벌써 여덟 시인 거예요. 지각한 거죠. 정신없이 일어나서 가방을 그대로 메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글쎄, 밤이었어요. 이불속을 막 빠져나온 뒤라 온몸은 나른하지, 벌떡 놀란 심장은 아직도 쾅쾅 뛰지, 아침인 줄 알고 허겁지겁 세상으로 나왔더니 고요한 밤이라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초승달이 가만히 떠있어서 골목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머쓱한 기분으로 "아, 밤이네!"하고 집으로 들어섰더니 엄마가 나를 보며 웃던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요. 할머니가 되어도 그날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노곤하고, 놀래고, 황당하고, 아름답고, 머쓱하고, 웃음이 슬쩍 나던 그런 밤. 뺨 위에 가만히 내려앉던 서늘한 공기도 아직 거기 그대로 일 것 같아 괜히 얼굴을 쓸어봅니다.


지난여름, 누군가에게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중학생이었을 때 저 먼 산에 걸린 무지개가 너무 아름다워서 자전거를 타고 쫓아갔더니 저만큼 멀어져 있고, 또 죽어라 자전거를 타고 달렸더니 저만큼 멀어져 있어서 하염없이 무지개를 쫓았던 어느 날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는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이야기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순수한 마음은 요즘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무지개를 쫓던 순간도 이 사람의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어떤 장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왜 달이며 무지개 이야기를 하느냐면, 지난 일요일에 바다에 다녀왔거든요. 원래 바다를 썩 좋아하진 않아요. 아버지가 바다 마을 사람이라 명절이면 으레 예닐곱 시간씩 향해야 하는 목적지였을 뿐. 수영도 할 줄 모르고, 조개며 생선이며 바다에서 나는 것들은 죄다 비려서 코를 막고 싫어하니 바다를 좋아할 이유가 없죠. 지난 일요일의 바다도 나의 결정이 아니고, 무리의 결정이어서 그저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까 되게 좋았어요. 마침 해가 질 무렵에 도착해서, 붉은 해가 바다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썩 예뻤던 바다는 아닌데, 물결 위에 살랑거리는 빛이 예뻐서 바다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어요. 무지개를 쫓아서 자전거를 달렸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해를 못 잡을게 빤한데, 해를 잡으러 자꾸만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리 중 누군가가 뒤에서 "신발 젖어!"하고 나를 불러 세워서 멈췄지만, 신발은 이미 젖어있었어요. 신발 젖는 게 두렵다기보다는 나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이 젖는 게 두려울 나이죠. 이제는. 물결 위에 드리는 붉은빛이 어물어물 사라지고, 파도소리만 가득한 바다 앞에서 한참이나 좋았습니다.


바다에서 돌아오고 나서, 책가방을 메고 달려 나갔던 그 밤을 다시 꺼내 뒤적거리다 왜 자꾸 그 장면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달이 있어서 그랬나 싶어요. 누군가 읽던 책을 휘리릭 넘기다 밑줄 친 문장에 저절로 눈이 가는 것처럼, 넓고 깊은 그 하늘에 눈둘 곳이 있던 밤이었으니까.  덕에 달을 오래오래 읽던 밤이었으니까. 멀어지는 무지개를 향해 자전거를 달리던 그 기억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이유는 눈앞에, 손끝에 잡힐 듯이 어른거리던 무지개 때문일 테니까. 무지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달리지 않았을 테니까. 내 몸 어딘가에 담아온 바다가 왜 그날의 달이며, 누군가의 무지개를 소환할까 싶었는데 이 모든 게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너무 아름다운 것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 내 삶에 많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순간의 틈마다 흘러넘쳤으면 좋겠어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귀한 줄도 모르고 헤프게 대했으면 좋겠어요. 밤하늘의 달을 들여다보고, 무지개를 쫓고, 파도소리를 쫓아 바다로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이 작은 일들이 인생에 아주 가끔 일어나선 안되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아주 오랜 달도 낡은 무지개도 가슴에 꼭 품고 있어선 안되는데. 그러게요. 그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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