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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03. 2020

한 겹 한 겹을 쌓는다

 


삼백 팔십사 겹.


무려 384겹을 자랑한다는 엄마손 파이가 출시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열렬한 신도이자 충성고객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던 용돈과 방에 굴러다니던 동전과 엄마 지갑까지 몰래 털어가며 - 현장에서 지갑 주인에게 걸리는 바람에 7년 산 심장 털릴 뻔했습니다 - 엄마손 파이를 말 그대로 어마어마하게 사 먹었다.



당신 인생은 몇 겹입니까?

엄마손 파이의 인기 비결은 얇고 풍부한 겹이다. 겹은 얇을수록, 그리고 층층이 쌓일수록 맛있다. 잠자리 날개마냥 손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정도의 투명하고 얇은 겹겹의 층 사이에 스며든 공기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들면서, 재료를 감싸 맛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해 준다. 엄마손 파이가 정말로 384겹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엄마손 파이는 1990년대 출시된 과자 중에 단연 최고로 많은 겹과 얇은 두께를 자랑하며 금세 많은 추종자를 양산했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 인생도 겹이 얇을수록, 층층이 쌓일수록 맛있다. 이건 모든 겹에 통용되는 공식이니까. 문제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바스락거리는 그 겹을 어떻게 만드느냐다. 게다가 한 겹도 아니고 384겹쯤 쌓아야 겹 사이에 스민 공기가 만들어내는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데, 인생의 풍미를 제대로 즐기려면 384겹을 언제 만들고 또 쌓느냐가 관건이다. 한숨이 푹 나온다.


다행한 사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 겹 한 겹을 쌓고 있다는 거다. 당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인간 엄마손파이가 될 것도 아니고, 1년은 365일이니까 365겹 정도로 적당히 합의를 보자. "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1년이 지나면 365겹이 쌓이는 거네!"하고 쾌재를 부를 누군가에게 다시 겹의 공식을 알려드립니다. 겹은 얇을수록 맛있습니다. 하루를 한 겹이라고 치면, 그 겹을 어떻게 얇고 바삭하게 만들까? 답은 간단하다. 반죽을 아주 얇고 넓게 밀면 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하루를 저마다의 무엇으로 채우고 있다. 혼자 하는 생각, 누군가와 나눈 대화,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 모니터 속의 업무, 책에서 발견한 문장, 마주한 그릇 안에 놓인 음식, 공기의 냄새, 하늘의 빛깔, 이어폰에 흐르는 음악... 이 모든 것들이 나의 하루를 만드는 반죽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내 겹의 재료가 된다. 하루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순간을 섬세하게 잡아챌수록 반죽은 더욱 넓어지는 동시에 얇아진다. 눈을 뜨고 하루가 시작된 건 알겠는데 '오늘 하루 뭘 했는지 모르겠어...'하고 눈을 떴던 자리에서 도로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다면, 그날은 채 밀지도 못했는데 굳어서 못쓰게 된 반죽이다.



엄마손 파이처럼 살고 싶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이런저런 의무에 치이다 보면 정신이 없다. 하루의 두께를 마주하면 '누구는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사나...' 하는 볼멘소리가 당연히 따라 나온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씻고, 미처 마스크를 챙기지 못해 대역죄인의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카페에서 입에 맞지 않는 수프로 마른 입안을 적시고, 퇴근 후엔 쌓인 세탁물의 1/3만 겨우 돌린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한다(이 글을 쓰는 지금, 아직 세탁물을 널지 못했다). 요새 꽤 피곤했는지 피부염이 재발했는데,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는 병원의 말을 귓등으로 흘릴 수밖에 없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분리수거하고, 장보고, 늦은 밤 뭐라도 한 줄 써보겠다고 낑낑대는 이 모든 게 무리다. 새해부터 운동을 하겠다고 과거의 실패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입한 실내자전거는, 한 달 동안 채 박스도 뜯지 못하고 현관 앞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을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 예쁜 언니가 나 좋아하는 쌀 라 쿠폰을 선물로 보내주었고, 새로 산 책의 문장이 내 심장을 쾅쾅 때렸고,하늘이 유독 맑았고, 사무실의 막내가 맛있는 빵을 엄청 사 왔고, 병원에서 피부염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말 한마디 덕분에 따뜻했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는 누군가를 위해 열림 버튼을 눌러주었고, 글을 써보겠다고 며칠째 키보드 앞에서 낑낑거리다 오늘도 포기할까 했는데 무사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 굳기 직전의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열심히 밀대로 미는 내가 여기에 있다.


삼백 팔십사 겹이 못돼도, 겹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포기하지 않고 살고 싶다. 겹을 만들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두툼한 호빵 같아 보이는 하루가 놀라운 속살을 보여줄 테니까. 아, 빨래를 널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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