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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30. 2020

생활


무라카미 하루키를 직접 만난 적은 없으니, 아마 어느 책에다가 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서랍을 열었을 때, 잘 정리된 양말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라고. 그 말이 입력되자마자 내 안에서 갓 구운 토스트처럼 톡 하고 튀어 오르는 건 "그 양말 누가 갰는데?" 하는 비아냥이다. 본인이 아침에 싼 도시락 뚜껑을 열며 "오늘 점심은 뭘까?"하고 기대하는 바보가 없는 것처럼-나는 좀 그런 편이긴 하지만- 서랍 안에 잘 정리된 양말은 그가 빨고 돌돌 말아 갠 뒤 서랍에 가지런히 넣은 게 아닐 확률이 높다. 그의 아내, 혹은 그가 고용하는 가정부가 해둔 것일 테지. 잘 정리된 양말에 감동하는 세계적인 작가 앞에, 나는 축 늘어진 채 젖은 양말 한 짝일 뿐. 나의 서랍은 어떤가. 서랍을 열면 한숨부터 나오니 한숨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서랍을 닫는다.


매일 아침마다 내 핸드폰이 성실히 알람을 울려준다. 대충 서른 번쯤. 고마운 일이다. 핸드폰이 잠깐 말을 할 수 있다면 "인디언은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면서요? 저도 이 인간이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시간에 못 깨우면 나를 바닥에 내팽개 칠 수도 있거든요."라고 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새벽  시 반까지 유튜브를 봤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세 배 더 괴롭다. 왜 그 새벽에 남의 집 귀한 아들이 후라이 세 개 올린 간밥에 계란 열개 깨 넣은 계란말이 얹어 먹는 걸 보고 있었을까. 겨우 일어나 시계를 보고 잠깐 각을 한다. 머리를 감을까 말까. 머리를 감으면 순도 백 프로의 지각이 예정되어 있다. 향기로운 머릿결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지, 출근시간 엄수로 집단 내 신뢰도를 구축할지. 뭐가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사실 둘 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고민하는 시간에 머리를 감으면 충분할 것을).


다음 관문은 도시락. <슬기로운 깜빵 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슬기롭다'라는 형용사가 붙은걸 봐선, 분명 주인공의 지혜와 요령이 한껏 돋보이는 내용일 텐데-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채식 생활은 슬기로움과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아둔하다'라는 말이 딱이다(물론 장기적이고 범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물과 자연을 보호하는 슬기로운 행동 중 하나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바깥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으니 지각이 염려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굶기 싫다면 뭔가를 직접 준비해야 한다. 도시락통 뚜껑을 찾아 헤매다 보면 시간은 훌쩍 가있다.


마지노선은 오전 8시 40분. 출발선에 선 마라토너처럼 시각을 확인하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총알같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뛴다. 한 손엔 가방, 한 손엔 도시락 가방을 들고뛰니 발걸음마다 달그닥 쿵쨕 달그닥 쿵쨕하는 소리가 난다(이 구역의 비트는 나야!) 정류장엔 나와 늘 비슷한 시간에 버스에 올라타는 아버지와 아들이 먼저 나와있는 편이다. 잠을 떨치지 못한 아이는 엉덩이가 훤히 다 드러나도록 보도블록에 쭈그려 앉아 졸거나, 아빠의 등에 업히기엔 분명히 큰 편이라 바닥에 발이 질질 끌리는데도 아빠 등에 매달려있다. 자식에게 살가운 부모를 보면 괜히 콧잔등이 찌르르하다. 내가 못 받아본 사랑을 다 받아본 아이를 잠깐, 그러니 깊이 부러워한다. 물론 바쁘게 뛰느라 숨을 헐떡여 그럴 가능성이 더 크지만.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도착해 계단을 와다다다 내려가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경우 자리가 없지만, 간혹 자리가 날 때가 있다. 그렇다면 가방에 넣어둔 책을 편다. 이때가 아니면 시간이 없다. 한 줄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펼친 책에 머리를 박고 졸거나 핸드폰으로 장을 본다. 역시 이때가 아니면 시간이 없다. 내게서 시장의 낭만을 앗아간 새벽 배송을 때론 미워하지만, 해도 뜨지 않은 컴컴한 새벽에 장바구니를 통째로 배달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과학의 진보인지. 출근을 하면 일을 하고, 점심때면 내가 아침에 싼 도시락 메뉴를 기대하며 뚜껑을 열고, 또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영어학원으로 간다(나머지 삼일은 다른 공부를 한다). 두 시간 동안 영어 선생님의 눈치를 적당히 보며 손짓 발짓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개수대에는 아침에 도시락을 싼 흔적이 가득 쌓여있고 세탁기에는 미처 주말에 빨지 못한 빨래가 수북하다. 그뿐인가. 바닥에는 급하게 머리를 말리느라 정리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나를 반긴다. 아.


이미 시간은 밤 열한 시. 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내려놓곤 끄아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잠깐 누웠다가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집에 있는 재료를 머릿속으로 조합해 내일 도시락 쌀 메뉴를 정한다. 세탁기를 흘끗 보지만 욕실 문을 닫아버릴 때가 대부분. 이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겨우 잠자리에 누우면 그제야 보상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바쁘게 사나..." 핸드폰을 켜고 좋아하는 웹툰 한편으로 가볍게 시작하는데, 어느새 남의 집 귀한 아들 라면 다섯 개에 밥 다섯 공기 말아먹는 걸 또 왜 보고 있니.  


세계적인 대작가 하루키는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마라톤도 하고, 뭐 내일들을 음악도 고르고 그러다가 잔다는데 - 물론 그도 작가가 되기 전에 술집을 운영하며 생업에만 매달렸던 시기가 있다만- 이렇게 살다가는 매일 아침, 짝 맞는 양말을 찾느라 내 인생을 다 쓸 것 같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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