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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12. 2020

모른 채로 잔뜩 눈부신 것


"... 내가 한때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잃어버렸다는 것이 놀랍고 슬프다."

<아무튼, 순정만화> 중   



모른 채로 잃어버린 

요즘 읽고 있는 책 두 권에는 '잃어버린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튼, 순정만화>의 저자 이마루는 어릴 때 그렇게나 좋아하던 순정만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순간,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깨닫고는 문득 놀라움과 슬픔을 느낀다. 또 한 권은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라는 일본 작가의 책인데, 선배 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늦잠을 실컷 잔 뒤 선배가 말아준 국수를 후룩후룩 먹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어도 몇 안될 순도 100퍼센트의 아름답고 눈부신 순간이지만, 정작 그 순간을 온몸으로 만나고 있는 주인공들은 그때가 그렇게나 아름답고 소중한 줄 절대로 모른다. 그 순간을 만끽했던 두 저자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때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하긴, 모르고 만끽하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그땐 절대 모른다'는 것 외에도 두 장면의 공통점 몇 가지를 찾아봤다.


1) 소소하다 : 그러니까 척 보기엔 하나도 안 아름답다
전날 밤까지 술 잔뜩 마시곤 취해서 늦게 일어난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온몸에 땀을 흘리며 국수 말아먹는 건 아름다움과 별 상관없어 보인다. 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 만화책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럴 땐 보통 책장을 넘기는 손톱 아래에 귤껍질이 껴있기 마련.


2) 난이도가 쉽다 : 하려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전에 혼자 무턱대고 런던에 갔을 때,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면서 "오, 여긴 누구 집이지? 다음에 남자 친구 생기면 같이 와봐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런던 여행은 (아직까지의 경험으론) 그때가 처음이자 마막이다. 그땐 몰랐지. 그 소원이 런던 갈 시간과 돈과 타이밍이 맞는 연인, 이 삼박자를 고루 충족해야 하는 별 다섯 개짜리 난이도의 소원이라는 걸. 그에 반해 책에 등장하는 두 상황은 언제든지 손쉽게 재할 수 있다. 예산이 든다 해도 만원 안팎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국수 몇 봉과 만화책이면 되니까.


3) 비교적 어릴 때의 경험이다 : 아, 도대체 인간이란 나이 들수록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1)과 2)의 성질은 2020년이 된 지금도 크게 변함이 없다. 거나하게 술 마시고 일어난 늦은 아침, 해장으로 라면이나 국수를 끓여먹는 행위가 갑자기 '웰빙'이나 '호강'의 이름을 덮어쓰지 않았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도 발표한 작품에 등장한 표현. 갑자기 작년부터 엄청나게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의 마케팅이 '소확행'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이라는 예쁜 말을 입긴 했지만. 만화책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순간이다.


문제는 3)이다. 시간을 되돌려 어릴 때로 갈 수는 없지만, 혹시 갈 수 있다 해도 똑같은 농도로 저 순간을 경험할 순 없다. 왜냐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이상, 절대로 다시 모르는 채로 돌아갈 수 없다.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면서 처음의 밀도를 경험할 순 없는 것처럼.



나의 순간들

두 책을 번아 읽으며-오래된 버릇입니다-모른 채로 잃어버린 나의 순간들 머릿속으로 더듬거리다가 다음의 몇 가지 순간들을 발견했다.


1. 라면 먹고 볼래?

세상이 뿜어내는 빛 덕분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환한 아침. TV 앞에서 세상 공손한 자세로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선, 다리 저린 줄도 모르고 만화영화를 본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면 엄마가 "라면 먹자!" 하고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고, 듣고서도 몇 번이나 못 들은 척하다가 엄마 목소리가 점점 커져 만화영화 주인공의 목소리를 뛰어넘으면 이크! 재빨리 일어나 밥상을 펴고 숟가락을 놓는다. 물론 눈은 줄곧 TV에 가있다. 왜 꼭 엄마가 라면 먹자고 부르는 순간은 놓치면 안 되는 결정적인 순간일까. 항상 꿈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알람이 울리는 것처럼.
TV 앞에서만은 항상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인지, 내복 무릎 부분은 늘 닳아있다. 상다리 펴려고 일어나면 그제야 내 다리가 몹시 저리다.


2. 러브 이진유 롸잇

제목도 모르는 팝송인데, 가사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표기하면 "러브 이진유 롸잇 앤 싸원트 가날러뷰 투 나일랏"이다. 내 인생 최초의 팝송이자 립싱크. 나와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둘 다 이 노래를 좋아해서-이 노래를 좋아한 건지, 이 노래를 립싱크하는 걸 좋아한 건지 아무튼- 틈날 때마다 둘이 마주 앉아 가사를 외웠다. 노래 제목도 몰랐고 안다한들 그때엔 인터넷도 없었으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놓칠세라 부리나케 몇 번이나 받아 적은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 그야말로 쪽 가사다. 드라마 쪽 대본처럼. 가족행사마다- 실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날들이 더 많았다-객석에서 원하지도 않는데, 오직 이 한곡으로 립싱크 공연을 해냈다. 남매가 치러낸 공연만 수십 회. 그때의 음악적 재능(?)을 살렸다면 지금 우리가 악동뮤지션이 됐을지 어떻게 아나(아쉽게도 둘은 악동도, 뮤지션도 못 되었다. 이 중에 뭐 하나만 되었어도 꽤 근사했을텐데, 그저 애매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이 노래가 기억나서, 동생에게 "러브 이진유 롸잇 앤 싸원트 가날러뷰 기억남?"하고 카톡을 보냈더니 "ㅇㅇ"이라는 참으로 무심하고 뭉클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3. 크리스마스

스무 살 무렵. 가지 말라고 눈물로 말리는 남자 친구에게, 딴에는 꽤나 멋있다고 생각한 "사랑은 다시 오지만,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라는 말을 날리고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작 1년짜리 유학이었다).


8월 끝무렵에 가서 니하오와 쒜쒜만 반복하다 보니 곧 12월이 돼버렸는데, 공산주의 국가답게 별 다른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지 않기도 했고 슬슬 집에도 가고 싶어 우울해하던 참이었다. 그날이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나 어쨌나.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려는데, 내 담임 선생님이었던 왕호우이엔-제발 맞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기를!-이 내 이름을 부르며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인형을 내밀었다. 낡은 회색 건물뿐인 어느 골목의 허름한 건물 입구에서 받아 든 너무너무 산뜻한 분홍색과 하늘색 옷을 입은 미국 쥐 두 마리.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산물인 크리스마스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 순간 인형을 받아 들곤 감격하기보다는 '내가 애도 아니고 몇 살인데...-정말 너 몇 살인데. 이 무시무시한 스무살아-'라는 생각을 했다. 꾸벅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 기숙사로 향하는 나를 선생님이 다시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손을 흔들었는데, 나는 그 뒤로 내가 맞이하는 모든 크리스마스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 질 줄 꿈에도 몰랐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생님이 생각난다. 어학원 벽면에 부딪쳐 통통 튀어 오르던 똥글똥글한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 중국에 인구가 몇 명이더라, 게다가 왕 씨는 또 몇 명이더라. 이름은 호우이엔이 맞나... <TV는 사랑을 싣고>에 의뢰하고 싶어도 지금 난 유명인이 아니고, TV가 13억 인구를 죄다 실어줄 순 없을 테니까 다시 볼 수 없겠지.  


모른 채 잃어버린 나의 순간들은 기껏해야 하나, 둘 일 줄 알았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까 계속 나와서 깜짝 놀라고 있다. 순간만 휘발된 게 아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전구처럼, 그 순간을 촘촘하게 장식하고 있던, 그 순간을 빛날 수 있게 해 주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어딘가로 증발해버렸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예쁜걸 못 알아보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몇 백장을 사모았던 스티커, 다 먹고 난 호두껍질에 털실과 색 고무찰흙으로 손발을 만들어 달아 주곤 늘 데리고 다녔던 호두 오 남매-정말 정말 아꼈는데!-, 몇 권이나 열심히 그린 만화 노트-나의 야심작은 <도넛의 비밀>과 <말하면 죽는 동굴>이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아직 꺼내지 않은, 선배와 국수를 말아먹던 일본 작가의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그들은 아직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전체를 통틀어 눈부시게 행복한 시간임을 모르고 있다."

다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오늘이지만, 어쩌면 진짜 행복은 이게 행복인 줄도 모르고 희끄무레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런 순간에 있는 걸지도. 행복한 순간도, 행복한 순간의 행방도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모르는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행복한 시간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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