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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16. 2020

DKNY



지난해의 끄트머리쯤, 작은 빵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가했다. 꼭 솔로만 와야 한다는 모임 기치에 맞게 다양한 스타일의 홀로들이 참가했는데, 참석 전부터 몹시 궁금하던 모임의 이름 뜻은 술이 몇 잔 오간 다음에야 용기를 내어 빵집 사장님께 물어볼 수 있었다. 요새 유행하는 말이려니 했다.

"저... DKNY가 무슨 뜻이에요? 브랜드명은 아닌 거 같고."

"DKNY 몰라요?"

"정말로 모르겠는데요..."

"독. 거. 노. 인!"

아, 나 지금 '독거노인' 모임에 와있는 거구나. 젊을 때부터 기웃거리는 모임이 DKNY라니. 그날의 모임은 그날대로 즐거웠지만, 나의 성향-내가 속한 모임들의 평균 연령은 나보다 최소 25, 30살 정도가 높다. 또래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싶다고 부르짖지만 정신 차려보면 늘 모임의 최연소다-을 감안하면, 이젠 젊은 모임에도 참가할 필요가 있었다. DKCY(독거 청연. 애써 라임을 맞춰봅시다)을 걱정한 주변에서 동호회든 술자리든 좀 나가라며 추천해준 앱이 생각났다. 앱을 열자마자 술과 연애와 낭만이 넘실거렸다. 어우야.


고르고 골라 다섯 개의 모임에 가입했다. 영어와 중국어, 독서, 채식, 배드민턴 모임이다. 욕심 많은 나의 성향과 그 욕심의 방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앱을 깐 지 두 달이 훌쩍 지나도록 그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절대 안 읽을 걸 알면서 책꽂이에 처박아두언젠가는 읽을 거라며 버리진 못하는 책처럼, 이 모임들도 내겐 그런 존재라는 걸.



모이고

사람 셋만 모여도 그중에 스승이 한 명 있다는데, 스승을 굳이 노는 자리에서까지 만나고 싶진 않은 건지 사람 셋만 모여도 아득해진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힘들다. 혼자가 제일 편하고 둘은 그래도 편한 축인데, 셋부터는 정신이 혼미하다. DKNY건 어쨌건 모임 몇 가지를 하고 있지만, 이건 순전히 콘텐츠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사람 많은 자리를 기피하는 나의 성향을 압도해버린 것뿐이다. 어머님들이 가득한 사찰요리 수업도 그중 한 가지고.


고르고 고른 다섯 개의 모임도 몇 번이나 '참석'을 눌렀다가 모임 직전에 슬며시 '취소'를 눌러버렸다. 나가려고 옷도 다 입었다. 현관문으로 한 발짝만 더 내밀면 되는데, 나는 끙끙거리다 애써 골라 입은 옷을 훌렁 벗고 내 영혼의 유니폼,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예전에는 형용할 수 없는, 나의 이 불안하고 끙끙거리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도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면 모임에 참석하려고 할 때마다 정말로 온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열이 나거나, 배가 꼬이거나, 난데없는 빈혈로 토할 것 같거나... 그러고 보면 대학을 다닐 때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이면 어김없이 온몸에 펄펄 열이 났는데, 그땐 낯선 얼굴이 가득한 자리에 가기 싫은 내 마음이 몸을 조종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임마다 참석 직전에 슬며시 증발해버리는 나의 성향을 스스로 간파하게 되면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진정한 DKNY로 살아갈 자신이 있다면 크게 상관없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직 이르다. 몇 번이나 취소를 누른 모임에 오늘은 정말로 나가려고 했다. 크게 준비할 것이 없었는데도 왜인지 시간이 훌쩍 흘러 지각이 예정되어 있었고,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갑자기 토할 것처럼 아프고 열이 펄펄 올랐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이기리라. 열이 나는 내 몸을 부정하며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설마 반대로 타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타기 전 방향을 꼼꼼히 보고 탔다. 고 생각했다.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모임에 가기 싫은 내 정신이 1) 몸을 굼뜨게 만들어 지각할 상황을 마련하고 2) 토할 것 같은 컨디션까지 완벽 세팅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3) 지하철을 반대로 태웠다. 타기 전에 반대방향으로 안 타려는 주의를 기울인 게 더 웃겼다. 진짜 속마음은 '설마 반대로 안 타는 건 아니겠지?'였던 건가. 이미 지각인 데다 도착하면 모임이 끝나고 다 함께 식사를 할 시간이지만,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으므로 모임에 간들 의미가 없었다. 운영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죄송하다는 사과를 거듭했다. 다시 반대편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씁쓸하고 지친 마음이 들어,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걸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배가 고팠다. 얼른 집에 가서 갓 지은 밥이 먹고 싶었다.



헤어진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힘들어하는 이유를 잘 안다. 잘 모이는 사람이 잘 헤어진다. 나는 헤어짐에 너무 취약하다. 누군가와 안 지 얼마가 되었든, 얼마나 깊은 마음을 주고받았든 그런 걸 다 떠나서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는 게 힘들다. 숨이 멈춘다. 다시 영영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냥 오늘 만나서 잘 놀고 "다음에 또 봐요!" 하는 가벼운 인사로 손을 흔들고 헤어지는 자리에서도 혼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는 내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 점이 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다. 한 사람의 뒷모습은 이제 겨우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이 한꺼번에 너무 많으면, 나는 그 장면을 버틸 자신이 없다.


중국에서 유학할 때 내 뒷줄에 앉은 제주도 출신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기숙사 침대에 혼자 누워있는데, 그 친구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불현듯 너무 슬퍼 한참을 울었다. 아직 유학 기간이 반년도 넘게 남아있었다. 유학이 끝나고는 연락 한 번도 안 했으면서, 그렇게 알량한 슬픔이라니.  


유독 이별 장면에서 혼자 난리부르스를 치는 이유는 뭘까. 그 뿌리를 더듬거리면 엄마와 깐순이가 아닐까 싶다. 내가 어릴 때 가정불화가 심했다. 그 시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그 시기를 나만의 방식-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자폐증이었다-으로 극복했는데, 엄마도 나름으로 엄마의 시기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늘 집을 나갈 만반의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엄마의 심기를 거슬러도 '집을 나가겠다'며 장롱 안에 준비된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섰는데, 한 살 어린 동생은 자지러지게 엄마를 붙들고 우는 반면 나는 그 뒷모습을 그냥 묵묵히 지켜봤다.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던 시기의 나였다. 엄마의 가출 퍼포먼스는 나의 유년 동안 몇 번이나 거듭 되었고, 나는 갈색 가방을 들고 내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그저 지켜봤다. 정말로 집을 나갈 생각이 없었던 건지, 갈 데가 없었던 건지 결국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그런 나를 매정하다고 야단했지만, 나는 빨리 자라서 부모에게 등을 돌려야겠다고, 멀어지는 뒷모습이 얼마나 아픈지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여러 번 다짐했다.


깐순이는 아마 내가 아홉 살 때-내가 아홉 살 일 때도 있었다니- 시장에서 사 온 강아지다. 엄마와 시장에 갔다가 바구니에 눈도 못 뜨고 담겨있는 걸 오천 원 주고 사 왔다. 개털 날리는 게 싫다며 개 기르는 걸 질색팔색 하던 엄마도 깐순이 하는 짓이 예뻐 좋아했다. 깐순이가 한번 새끼를 낳았는데, 하얗고 고물거리는 게 예뻐 가만히 품에 았다가 엄마가 개털 묻는다며 내 옷소매를 턴 순간 새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당이 시멘트 바닥이었다. 아. 강아지가 눈도 못 뜨고 발발 떠는데 어떻게 할 줄 몰라 우유를 먹이고 별 짓을 다했지만 죽었다.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갈 때의 느낌과 나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선득했다. 뒷산에 묻어주러 가면서 너무 많이 울었다. 깐순이는 나를 용서했을까. 내가 대학생일 때, 깐순이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뒷모습을 힘들어하는 걸 알아서 그런지 뒷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렸다. 나는 깐순이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한다. 나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이지만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강아지를 다시는 키우지 않는다.



모임 장소와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반대방향의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좀 울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괜히 지하철 천장을 봤다. 읽고 있던 책에 나오는 '... 얼굴에 무릎을 묻은 채 조금 울었고...'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함께 살던 고양이를 하늘로 보낸 뒤의 시간에 대해서 적혀있었다. 세상에는 무슨 패션 화보처럼 수만 가지 스타일의 뒷모습이 존재하지만, 겪는 사람들은 오직 딱 한 개의 마음으로 뒷모습의 계절을 난다.


아무리 내가 애를 쓰고 악을 쓰며 내 삶에 등장했다 사라질 뒷모습을 원천 봉쇄한데도, 언젠가는 내 인생조차 내게 뒷모습을 보이는 날이 올 텐데 나는 아직까지 이러고 있다. 내 인생의 DKNY는 '독거노인'이 아니라 '다. 같이. 놀아. 요'였으면 좋겠는데, 다 같이 놀려면 뒷모습에 언젠가는 씩씩해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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