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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20. 2020

알량한 초능력자가 꿈입니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다 읽진 못했지만, '정세랑 월드'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그녀의 세계 월드를 기웃거리고 있노라면, 그곳을 도도하게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을 금세 만날 수 있다. 강의 이름은 바로 초능력.


나는 <피프티 피플>이라는 소설로 정세랑의 작품을 처음 시작해 그녀가 SF작가인 줄 몰랐는데, 시간을 되짚어 그녀의 작품들을 거꾸로 읽어나가니 온통 SF였다. 아, 이 사람 장르 작가였구나. 주인공들에겐 초능력이 있고, 여느 SF물처럼 어김없이 그 초능력을 둘러싼 여러 상황이 벌어진다.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가진 초능력은 어째 하나같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얄팍한 초능력으로 

사전은 초능력을 이렇게 풀이한다.

[명사] 현대 과학으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 염력, 예지, 텔레파시, 투시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사전적 정의에 기대 보면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은 분명 초능력자이지만-합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다는 점에서-, 어째 좀 애매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간 만나온 초능력자들이 너무 근사했기 때문일까나. 영화나 만화영화, 웹툰, 소설 등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닥터 스트레인지), 해머를 휘둘러 천둥번개를 마음대로 조종한다(토르). 일본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에 등장하는 날씨 소녀는 어떤 흐린 날도 맑은 날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고, 웹툰 <무빙>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하늘을 날고, 시간을 멈추고, 총알보다 빨리 달린다. 의심할 바 없는 초능력이다.


그런데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이 갖게 된 초능력은 좀 맥이 빠진다. 손톱깎이 몇 개를 고장낼 정도로 갑자기 손톱이 단단해진다거나, 타려고 마음만 먹으면 엘리베이터가 알아서 멈춘다거나, 헤어진 여자 친구가 쓰는 소설의 문장이 몸 여기저기에 문신처럼 나타난다거나 하는 식. 용도도 알 수 없고, 설명서가 아예 없거나 생전 처음 보는 꼬부랑글씨로 적힌 조악한 설명서 한 장이 전부인 주방기구를 받아 든 것처럼, 주인공들도 갑자기 생긴 초능력에 좀 당황하는 눈치다. "이걸 대체 어디에 쓴다..."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을 따라 걷거나 뛰다가 하다 보면-책을 펼친 이상 따라갈 수밖에-강물이 향하는 곳을 저절로 향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한 사람이 서있다.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은 주방기구, 아니 초능력으로 그 사람을 구한다. 의심할 바 없는 초능력을 가진 자들은 능력만큼이나 포부도 원대하던데. 우주의 먼 장래를 생각해서 생명체 균형을 맞춘다거나(타노스), 그런 놈에 맞서 우주를 구한다거나(아이언맨은 아예 지구로 돌진해오는 행성 하나를 온몸으로 막아 버린다)... 평화 건 파괴 건 우주는 됐고, 좀 더 실익에 밝은 자들은 산업 하나를 통째로 먹기 위해 알아주는 거물급 브로커가 되던가 그 지역의 갱으로 군림하기도 한다(어느 영화에서 봤더라). 아무튼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은 우주의 안부 따위 관심 없다. 하던 일 잘하거나 잘 못하고, 가족과 소소하거나 거대한 갈등이 있고, 곁에 좋은 친구 한 둘 쯤 있거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람을 구한다. 한 사람을 구하거나, 둘을 구하거나, 운 좋으면 셋까지 겨우 구한다.



구해줘서 고마워요(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녀의 초기 작품인 <덧니가 보고 싶어>의 남자 친구는 몸 여기저기에 자꾸 생기는 문신 때문에 죽을 맛인데, 그 문신은 다름 아닌 소설가인 구 여친의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남자 친구는 새로 사귄 여자 친구의 질투 어린 뒷조사로 그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늘 피부에 까만색으로 나타나던 문장이 빨간색으로 나타나자 남자 친구는 구 여친의 신상에 위험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요즘 읽고 있는 <재인, 재, 재>의 주인공 삼 남매는 바지락 칼국수 집에 모여 칼국수를 먹은 뒤로, 갑작스럽게 각자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된다. 손톱이 단단해지고, 엘리베이터가 말을 듣고, 위험 상황에는 시야가 벌게진다. 사소하고 황당한 이 능력을 가지고 이들은 사람을 구한다. <피프티 피플>은 제목처럼 등장인물 50명-실은 51명이라고 작가가 밝혔지만-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 역설적으로 주인공이 없지만, 모두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잘 맞물려있다. 그 50명은 초능력자가 아니지만,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구한다. 사려 깊은 시선으로,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잘 숙련된 업무 능력으로 구하는 줄도 모르고 구한다. 본인들은 꿈에도 모를 테지만. 정세랑 월드의 강변을 걷고 뛰고 구르 문득 '구한다'는 사실에 포커스를 맞추게 됐을 때, 내가 그동안 허공을 향해 수없이 중얼거렸던 '고마워요'라는 말이 비로소 대상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초능력자 중에서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가장 좋아하는데, 툭하면 과거를 되짚어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고 절망하는 내게는 그 능력이 가장 절실하고 와 닿았기 때문이겠지. 10년만 되돌릴 수 있다면 전공을 아예 다른 걸 선택했을 거야, 엄마가 반대해도 내 뜻대로 밀어붙였을 거야, 그때 그 회사에서 좀 더 버텼어야 하는 건데, 내가 왜 그때는 그렇게 성급했을까? 뭐 이런 고민들로 머리만 벅벅 긁다 보면 내가 참 하찮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싶은데, 막상 닥터 스트레인지가 내 눈앞에 나타나 타임 스톤을 쥐어준다면 신나게 10년 전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를 관통한 수많은 문장과 음악과 영화와 무대와 그 밖의 수많은 순간들을, 도무지 같은 빈도와 밀도와 온도로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내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수많은 책과 CD를 사모으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러 다닐 수 있을까. 펼치자마자 나를 한숨짓게 했던 문장과 선율을, 다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그러모아서 내 안에 쌓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두려워졌다. 서점에서 우연히 펼친 책의 한 문장이, 설거지를 하면서 들었던 노래가, 객석에 붙박인 듯이 앉아 눈물만 줄줄 흘렸던 어떤 작은 무대가, 자기 전 들여다보곤 하는 웹툰이 나를 구했는데. 이런 글을 써줘서, 이런 노래를 만들어줘서, 이런 연기를 해줘서, 이런 그림을 그려줘서 고맙다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초능력 연습생입니다

얼마 전, 별로 마음 쓰지 않았던 공간(브런치는 아닙니다. 여기에 내 모든 마음을 다 쓰고 있죠)에 끄적이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글에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다.

'새로운 글이 언제 올라오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 이거 장난으로 하면 안 돼. 그때부터 마음을 잡고 꾸준히 연재-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를 시작했다. 모든 댓글에 시간을 쪼개 일일이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혼자 끄적거리던 블로그에도 누군가의 댓글이 있었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너무 알량하고 애매하고 초라한, 때론 쓰임도 잘 모르는 주방기구 같다고 생각하는 내 능력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나를 믿고 마음껏 기댄다는 걸. 수없이 많은 순간을 지나오며 어쩌면 그러나 싶게 한 번도 빠짐없이 넘어질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나를 구해준, 구하는 줄도 모르면서 구해준 사람들처럼 나도 어쩌면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런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걸.


모두가 주인공이기에 주인공이 없는 소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어쩌면 초능력자가 아닐까. 모두가 초능력자이기에 초능력자가 없는 건 아닐까. 대단한 초능력이라면 좋겠지만 기껏 쥐어짜야 애매한 초능력. 자신이 만든 한 줄의 문장이, 한 마디의 노래가, 한 접시의 요리가, 잠깐의 눈빛이, 다정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들.


퇴근 후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앉은 지 세 시간이 지났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지방 출장이 있어서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한다. 커서만 껌뻑껌뻑하는 빈 화면을 마주 보면 두렵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겨우 시작한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쓰다가, 아예 노트북을 덮어버리는 수많은 밤을 누군가는 알까? 힘들고 졸리다. 그렇지만 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니, 이 정도는 초능력 연습생으로서 감수해야지. 정세랑 월드의 주인공들처럼 그저 딱 한 명, 운 좋으면 겨우 세 명 정도 구할 수 있는 '알량한' 초능력이면 나는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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