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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28. 2020

無事

오늘, 낮



기침을 삼키고  

지하철을 타면 발작적으로 기침이 나온다. 기침을 하면 안 된다는 압박 때문인지 되려 기침이 멈추지도 않고 계속되는데, 아무리 마스크를 끼고 있다한들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힘주어 간신히 삼키곤 한다. 그렇게 삼킨 기침은 가장자리에 칼날이라도 박힌 것처럼 목구멍을 긁는데, 결국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어 지하철을 탄 내 눈가는 늘 촉촉하다.


코로나 확산에 따라 몇몇 대기업은 재택근무를 선택했지만, 재택근무와의 거리가 지구에서 달만큼 떨어져 있는 나는 매일 아침 (기침을 참느라) 눈물을 흘리며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직원들이 종노릇도 대감집서 해야 한다며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매일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입장이겠지. 다스베이더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한 조절장치가 달려있는 마스크부터 시작해서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손에 낀 사람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게 바로 2020년 과학의 현주소인가 싶어 한번 웃고 만다.


오 년 전, 태국에 놀러 갔을 때 거리의 사람들이 (오토바이 매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걸 보고 "와, 이 나라 사람들은 진짜 불쌍하다"라고 중얼거렸는데, 지금 태국 사람들이 한국을 보면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루에 마주치는 거리의 모든 얼굴은 마스크다. 지하철 역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라고 시작되는 안내방송이 수차례 울려 퍼져 외울 지경인데, 그 방송을 들으면서 마스크를 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있으면 흡사 영화 촬영 중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매일 실시간 검색창으로 누가 죽었다더라, 또 죽었다더라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드는 감정은 두려움도, 애도도, 분노도 아니다. 그저 의아할 뿐이다. 이게 실제 상황인가? 자주 반문한다. 현재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확인해보니 국내 확진자가 약 1,800명이다. 하룻밤 사이에 500명씩 늘고 있다.


주변 지인들이 대구에 사는 가족들은 괜찮냐고 대신 안부를 물어올 때도, 남동생이 아는 사람을 통해 마스크를 25만 원어치 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했을 때도-마스크 한 장이 4천 원 선에 거래되고 있는데, 대구에서는 웃돈을 주고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서 동생은 결국 돈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엄마가 마스크 다섯 개를 9천 원에 샀다며 카톡방에 오늘의 행운을 자랑할 때도,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이마트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도,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을 재난 소설이나 영화로 풀면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마음을 삼킵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평정심이 있어 이 시국에 혼자 고고한 건 아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주워들은 옆자리 통화의 상대방처럼 지금 하와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와이라면 왠지 코로나는 알로하로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다- 먹을 것 잔뜩 쌓아놓고 몇 달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자동차가 있어서 출퇴근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의 모든 장면이 평소와 비슷한데 확진자가 이천 명이 되고 곧 삼천 명이 될 거라면, 과연 나는 일상의 곳곳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삼천 명을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잘 모를 뿐이다. 가족들이 걱정되지만 대구에 가볼 수도 없다. 국내 확진자의 80% 이상이 그곳에 모여있다. "괜찮냐?"는 나의 물음은 공허할 뿐이다.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오지만 "괜찮지 않다"라는 대답은 어쩌면 괜찮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아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줄을 대 마스크 몇 장이라도 사기 위해 기웃거리는 가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대구에서는 세대당 마스크 두 장을 나눠줬다는데, 세대 인원수 관계없이 무조건 세대 주 앞으로 두 장이라는 소식에 잠깐 웃었다. 한 세대당 두명만 외출하라는 건가, 돌려 끼라는 건가 거참.


하루에도 몇 차례 핸드폰 경보음이 울린다. 미세먼지 요란할 때나 울리는 줄 알았더니, 이젠 '전염병'이라는 단어가 뜬다. 먼지면 다 미세한 거 아니냐며, 먼지보다 더 미세한 먼지는 대체 어떤 거냐며,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다 이젠 웬만한 미세먼지는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것처럼 언젠가는 전염병이라는 단어에도 무색해지게 될까. 미세먼지, 전염병, 그다음엔 과연 뭘까.


코로나 대응 업무를 처리하던 30대 공무원이 차를 몰고 한강으로 가서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봤다. 그가 받아냈을 수만 개의 욕지거리와 여과되지 않은 분노를 생각한다. 어차피 나빠지는 길 밖에 없다면, 다들 하루빨리 무감해지기를 소원해야 할까.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삼키는 것처럼 내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것들을 꾸역꾸역 삼킬 뿐. 이미 우리 모두 무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무사하기를 바란다.




(+)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며칠 동안 이러저러한 글을 끄적거려 봤는데 도무지 써지질 않아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수선한 가운데 글마저 어수선한 소재를 택해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동안 썼던 글 중에 아마 숫자가 가장 많이 등장하지 않았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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