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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r 04. 2020

꽂히기보다는 머물고 싶다



안 꽂히는 노래 찾습니다

아침. 출근을 하면 자리에 털썩 앉아-이미 지쳤다-모니터를 켜고 이어폰을 꽂는다. 같은 노래를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실은 한 달도 넘게 줄곧 듣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선곡이 중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일 선곡에 드는 시간은 1초 남짓. 어제 들었던 그 노래를 들으면 되기 때문이다. 곡을 바꿀 때는 꽤나 신경 써서 고르는 편이라, 한번 정했다면 질린다 싶을 때까지 잘 듣는다. 업무 중에 듣는 노래를 선택하는 엄정한 기준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 기준을 모두 통과한 노래만이 내 귓가에서 반복 재생될 수 있는 영광(?)을 누린다.


가사가 잘 들리면 안 된다(나도 모르게 따라 부른다), 가사가 안 들리면 안 된다(최소한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지는 알고 싶다), 멜로디가 산뜻하면 안 된다(나는 사무실에 매여있는데 노래의 발랄함이 지구 성층권을 넘어 우주까지 뚫어버릴 기세라면 아 정녕 어쩌란 말인가), 너무 감성적이면 안된다(모니터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 남자 여자 듀엣은 안된다(난 솔로이기 때문이다)... 뭐 이밖에도 여러 가지 기준이 있기 때문에, 글을 읽는 분들은 도대체 이 많은 기준을 통과하는 노래는 어떤 노래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법하다. 참고로 내가 약 1년간 즐겨 들었던 것은 대나무 밭에 바람 부는 소리였다. 매일 뭔가를 듣는 나를 궁금해한 옆자리 선배가 "뭐 들어?"하고 내 이어폰 한쪽을 귀에 끼고는, 잠시 뒤 대나무 밭에 부는 바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소리는 가사가 없지 않냐고 또 의문을 가질 분들이 있을 텐데, 귀를 기울이면 바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 그만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모든 까다롭고 복잡한 기준을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안 꽂히는 노래'다. 9 to 6의 업무, 점심시간을 빼더라도 여덟 시간, 하루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노래는 꽂히면 안 된다. 시작부터 멜로디가 두 주먹 꽉 쥐고 내 심장을 때리고 발로 차서도 안되고, 첫마디를 시작한 보컬의 날숨 섞인 목소리가 내 심장을 움켜잡아서도 안된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그 가사만 곱씹고 싶어도 안된다. 귓가에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한 노래를 듣는다. '내 귀에 안개'랄까.



나도 안 꽂히고 싶다

오늘도 아침을 시작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며, 귀로는 안개를 음미했다. 남자 보컬이 뭐라고 중얼중얼하는데, 아마 일주일째 듣고 있는데도 가사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오늘도 무난하게 이 노래 한 곡으로 업무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꽂히는 구석이 있는 노래는 단숨에 내 심장을 끌고가 우주 귀퉁이까지 데려다 놓는데, 나는 어째서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엷은 노래를 오히려 오래 들을 수 있는 걸까. 좋은 구석이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문득 '꽂히다'라는 말을 종이에 그려보았더니 점 하나였다. 깊이로 따지자면 종이를 폭 뚫을 수 있을 테지. 안개 노래들은 종이에 그릴 수 없지만, 애써 그려본다면 넘실넘실 물결이나 둥실둥실 먼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 나의 세계에서는 따끔한 점보다 가볍게 떠다니는 먼지가 생명력이 긴 셈이다. 왤까. 종이를 들여다보며 곰곰 생각해봤다.


꽂히는 건 딱 한 순간, 종이에 그린 점 하나다. 하나를 무한 반복할 수는 없다. 딱 하나는 닳는다. 휘발되고 변형된다. 흐르는 물결이나 부유하는 먼지는 어떤가. 들여다보면 무수한 점의 연결이다. 언뜻 보면 꽂히는 게 없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꽂히는 순간이 무한대로 있다. 확실하고 떠들썩한 것들이 내 곁을 맴돌았지만 어느새 없다. 너무나 크고 단단하고 무거운 것들이 물러간 자리는 아무도 모른다. 곁에 두고 싶은 건 애매모호한 것. 언제까지나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두루뭉술한 것. 희미하고 흐린 것들이 내 곁에 간신히 머무를 수 있다. 욕심을 좀 내본다면 애매하고 두루뭉술하고 희미하고 엷은 것들을 만들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우, 너무 큰 욕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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