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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r 01. 2020

당연한 세계



당연한 것들이

코로나가 에워싼 일상의 풍경이 새롭다. 운 좋으면 앉을자리 겨우 하나 둘 있던 출근길 버스는 믿을 수 없게도 나 혼자 탄다. 텅 빈 버스에 몸을 실을 때면 바이러스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지구 최후의 생존자가 된 느낌도 들고, 모두가 다른 행성으로 떠나버리고 나 혼자 덩그러니 지구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쨌든 둘 다 쓸쓸한 건 마찬가지다. 출퇴근길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갈 수 있다는 씁쓸하고 쓸쓸한 기적과 더불어, 구걸하는 기분으로 빈자리를 찾아 카페 몇 군데를 사십 분 넘게 뒤적거릴 일도 없어졌다. 이 또한 기적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데, 마스크 대란이다 품절이다 말도 많지만 이 난리통 가운데 다들 어떻게든 마스크를 구했다는 사실 또한 기적처럼 다가온다.  


뜻하지 않은 기적의 대가로 많은 것을 내줬다. 모처럼 날씨 좋은 주말이라도 마음껏 걷지 못하고, 영화관 의자에 푹 파묻히지 못한다. 주말 아침이면 칼을 쥐고 불 앞에 서있어야 하는데, 모든 강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핸드폰을 쥐고 누워있다. 서점에 가려던 발걸음이 주춤거리고,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도 다음으로 미뤄뒀다. 식당 주방에서 들리는 재채기 소리와 함께 나온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가기가 망설여진다. 아주 작은 아이가 마스크를 끼고 있기에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는데, 정작 아이의 두 다리는 너무 신나게 뛰고 있어서 딱한 건 그냥 나였구나 싶었다. 나는 맑은 하늘을 실컷 보며 자랐지만, 저 아이는 맑은 하늘을 본 적이 몇 번 없을 테니 아쉬움도 슬픔도 모르겠구나. 아쉬움도 슬픔도 모르는 걸 두고 아쉬워하고 슬퍼할 필요는 없겠지. 딱한 건 나다. 당연하다 여겼던 일상이 헝클어지니 내 기분도 덩덜아 헝클어지려다, 신나게 뛰던 아이 때문에 간신히 멈춘 것 같다. 마구 헝클어지려던 자리에 '당연한 건 뭐지? 원래부터 당연한 게 있긴 한가?'라는 질문이 끼어든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는 열아홉 살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갔는데-'북경이 베이징의 수도인가?'수준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다-그동안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내 세계가 중국에서 많이 부서졌다. 어떻게 바다를 한 번도 못 봤지 싶어 깜짝 놀라다가, 그제야 바다가 삼면이라는 우리나라의 처지를 떠올리는 것이다(그 뒤로, 한 번도 눈 내리는 걸 못 봤다는 대답을 들었을 땐 좀 덜 놀랐다). 당연했던 나의 세계가 산산조각 났지만, 지금 그 시기를 되돌아보면 그렇게 부서질게 많아서 놀랍고 재미있었다. 마치 시장에서 야채 내다 팔듯,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아이스크림을 내다 팔던 하얼빈의 어느 겨울밤엔 당연한 듯이 영하 30도에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다녔다.



당연하지 않게 되어간다 

당연한 것들이 부서질 때 놀랍고 기뻐했던 내가 놀라울 정도로, 이제의 나는 당연한 세계가 야금야금 허물어질 때마다 문득 슬픔을 느낀다. 비 내린 뒤에야 볼 수 있는 말간 하늘색이 지겹다고 여기던 날들이 있었는데. 옥상 평상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하늘을 보고 있는 건지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있는 건지 무서울 정도로 맑고 아득했는데. 마스크 같은 건 수상한 사람이나 끼는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유기농이니 자연 농이란 말은 몰라도 그만이었던 때가 있었고, 착한 사람은 반드시 이긴다고 믿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까지나 그대로 일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는데.


마스크 한 장에 혼자 너무 멀리 왔나 싶지만, 나는 왜 자꾸 당연한 모든 것들을 하나 둘 잃어버릴 것 같이 슬프고 불안할까. 이제는 아무도 냇물을 마시지 않고, 길에 핀 사루비아를 따먹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맑은 하늘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고 마스크를 빼놓고는 세상을 걸을 수 없다면. 내가 살고 있는 골목 끝에 벌컥 피어난 해바라기 한 송이처럼, 겨울에 꽃이 피고 여름에 눈이 내린다면. 언젠가 "나는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왜 그때는 기쁘고 지금은 슬플까. 나조차도 당연하지 않아서

딱한 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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