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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r 05. 2020

울려면 곱게 울 것이지

그 시각 엄마는...


지금 다니는 회사는 사무실이 무척 좁아 별다른 휴게 공간이 없다. 게다가 회사 건물도 지하철 역 앞에 떡 하니 위치하고 있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봤자 거닐 수 있는 건 건물과 연결되는 지하통로 혹은 차도 옆 보도블록뿐이다. 나무 하나 없는 스산한 거리라 영 나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잠시 쉬고 싶으면 별 수 없이 비상구 계단참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거나 핸드폰을 좀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선점당하면 자리로 돌아 아픈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본다(근로자 업무시간을 늘이기 위한 의도로 건축된 건물인가!).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봐도 좀처럼 집중이 될 리가 없다. 그럴 땐 온라인 서점을 기웃거리는데-퇴근하면 책이 문 앞에 와있더라고요-오늘도 어김없이 마우스로 책 몇 권을 들춰보고 다녔다. 별 기대도 없책 몇 장을 읽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 '아니, 미리보기가 이렇게 감동적인 책은 처음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모니터 앞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내 모습이 황망해 얼른 눈물을 닦았다(회사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울었던 대부분의 이유는, 이제는 흘러간 옛 애인들과 메신저로 싸울 때였는데 혹여나 그런 오해를 살까 봐였다).


더욱 황망한 건 그다음이다. 대구에 살고 있는 엄마는 요즘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우체국이며 농협이며 가리지 않고 찾아가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산다. 줄을 선다고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번호표를 받은 사람만 살 수가 있어서,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번호표 인증샷을 나에게 보낸다. 번호표를 받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세네 시간씩 줄을 서야 하고, 번호표를 받았다 해도 마스크 배포 시각까지 다시 기다렸다가 살 수 있는 게 일인당 고작 두 장이라는 게 참 허탈한데, 하지 말라고 거듭 얘기는 하지만 내가 마스크를 보내드릴 수도 없고 집에 찾아가 볼 수도 없으니 그저 이렇게 소식을 접할 뿐이다. 더욱 황망한 건 그다음이라고 쓴 이유는, 메신저로 날아온 엄마의 번호표 인증샷에다가 화를 냈기 때문이다.

"맨날 무릎 아프다면서 그렇게 무리하다가 더 아파요!"라고, 한 겹 까 보면 은근히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좀 묻어있는 적당하고 정당한 화가 아니다. 갑자기 나는 이렇게 메신저를 보냈다.

"엄마, 왜 내가 어릴 때 툭하면 나를 무시했어?"


네? 이건 마치 아주 옛날에 읽은, 매우 유치하지만 왠지 찝찝하게 무서운 소설의 전개 태세와 비슷하지 않은가. 학교에서 두 친구가 늦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아직도 네 친구로 보이니?"라면서 귀신이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던가... 아무튼 나는 갑자기 그렇게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침부터 번호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뿐이고, 280번에서 끝나는 번호표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합격해 기쁨의 인증샷을 딸자식에게 보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왜 나를 무시했어?"라니.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엄마는 "내가 그랬었다고? 미안하다. 엄마도 그땐 어려서... 너그러이 용서해줘."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렇다. 나이를 꼽아보면 그때의 엄마 지금의 나만할 때다. 그래도 나는 그치지 않았다. "왜 부모들은 자식이었을 때 제일 싫었던 걸, 결국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주는 거야?" 방방. 엄마도 그치지 않았다. "미안해, 용서해 줘."


뭐가 그렇게 서럽고 억울했던지, 지난 과거를 모두 소환한 나는 모니터 앞에서 남자 친구 백 명을 동시에 사귀다가 동시에 싸우고 헤어진 여자처럼 폭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휴지를 뽑아 들고 울다가, 진정이 되지 않아 계단참에서 쪼그려 앉았다 섰다 하면서 감정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내가 엄마에게 못되게 굴었던 일은 싸그리 잘도 다 까먹었으면서.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부모 역시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합리적으로 불공평한지.


회사원의 좋은 점은 기능적이라는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 앞에 앉아 묵묵히 일을 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예전에 좋아했던 문장이 생각났다(지금 꺼내보니 좀 유치하긴 한데, 그래도 이 문장을 퍽이나 좋아했었다. 십 년이 지나도록 기억하는 걸 보면).

"할머니, 왜 가지에 소금을 뿌리는 거예요?"
"그래야 가지가 울거든. 사람처럼 가지도 울어야 쓴맛이 없어진단다."

곰곰 생각해보니 요즘 내 마음이 좀 썼다 싶었다. 그래서 좀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울려면 곱게 울 것이지... 머쓱한 마음에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아까 나를 울게 한 책을 구입하려고 다시 읽어보니 웬걸,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울었나 싶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괜히 책이며 20년 전 엄마만 애꿎게 만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무릎 약 사줄까?" "집에 과일은 있어요?" "견과류 드실래요?"라고 별 메시지를 다 보냈다. "아니"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답장을 받았다. 이게 다 울 곳 없는 좁은 건물 때문이다. 회사원도 울고 싶다고. 쩝.


*오늘의 브금 : 파리넬리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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