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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r 21. 2020

그곳은 암석과 먼지와 얼음뿐이더라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초판 사인본



질투가 난다

나는 박상영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박상영을 질투해왔다. 질투가 뼛속까지 사무쳤다. 책을 펼치면 글이 막 날아다녔다.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글마다 좋을 수 있나 싶어 분했다. 주변에서 추천해줄 만한 책이 없냐고 물어보면, 나름대로 좋은 책들을 골라 추천해줬지만 박상영만은 그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잘 나가는 작가인데다, 내가 추천해봤자 이미 잘 나감에 판매부수 한 권이나 두 권이 겨우 더해질 따름일 뿐이지만(인성이 이렇게나 알량해서 이런 식으로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박상영을 향한 질투는 애초부터 시작됐으나,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후에도 이 감정을 '지독한 팬심'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작가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나에게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물었고 "박상영이요. 아, 질투가 나서 죽겠어요."하고 대답했다. 무심결에 나도 모르던 감정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나 요기 있지, 하고. 내가 준비하는 책을 알고 있던 작가분이 놀란 눈으로 "앞으로 소설 쓰게요?"하고 물었고, 소설 쓰기의 참혹함을 이미 온몸으로 맛본 적이 있는 나는 "에이, 그럴 리가요!"하고 손사래를 쳤다(소설은 정말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에세이를(요리책 다음으로)가장 많이 좋아하고, 그러니 (요리책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었고, 그러다 보니 준비하는 책도 당연히 에세이였는데 그럼에도 왜 나는 소설가 박상영을 질투할까. 내가 쓸 수 없지만,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걸 그가 썼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뭘 (처)먹고 이렇게 잘 쓰나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그가 최근 펴낸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심지어 에세이까지 잘 쓰지만, 다행히 소설의 매력보다는 살짝 덜하다. 박상영은 소설에서 정말 날아다닌다-에는 밤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각종 신체, 정신 질환에 시달린다고 고백해놓았더라. 이 남자가 내 남자 친구였다면, 나는 그의 멋있음을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하는 양가적 감정에 시달렸을 것만 같다.



그리고 부끄럽다, 몹시

사람은 비교를 할 때 비이성적이 된다. 시소의 한쪽에는 현재 자신의 가장 비루한, 자기만이 겨우 알아차리는 온갖 부정적인 요소-예를 들면 주머니의 먼지까지-를 세세히 올려놓는 동시에, 시소의 반대쪽에는 비교대상이 가지고 있을 만한 두루뭉술한 것들을 내 짐작으로 올려놓는다. 당연히 비교의 시소는 주머니의 먼지까지 털어 올려놓은 내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니가 사는 그 집(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니가 타는 그 차(그 차~), 그 차가 내 차였어야 해"라고 가수 박진영이 왠지 볼 때마다 슬퍼 보이는 미간으로 흐느적흐느적 노래하는 것처럼, 나도 박상영에게 어쩌면 그런 감정을 느낀걸 수도 있다. 가 써낸 그 글, 그 재치, 그 인기 모두 내 것이어야 해 하고. 이런 감정조차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이,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글을 써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한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젠가는 내 책을 쓰고 싶은데... 하고, 알량한 마음만큼의 노력을 가끔 기울였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날아다니는 그의 글을 읽으면, 박진영의 슬퍼 보이는 미간을 흉내 내며 읊조리는 것이다. 니가 써낸 그 글~하고 찌질한 마음을 듬뿍 담아서.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박상영 포함)은 이랬다. 1) 재능을 타고났고 2) 그 재능을 일찌감치 스스로가 간파해 헛발 디디지 않았고 3) 글만 써도 생계가 충분히 해결될 환경을 갖추고 있어 회사 같은 데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고 4)그래서 글에 매진할 시간이 확보되니 글을 더 잘 쓰게 되고 5) 그런 글은 당연히 그를 (인기) 작가로 만든다.  


나는 1)에서 4)까지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5)가 못되는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직장인'이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고, 회사 다녀오면 몸과 마음 골고루 녹초가 되어 쓸 거리도 생각나지 않고 쓸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글쓰기를 교육받은 적도 없으니까, 대학원을 가야 되지 않을까 했다(물론 갈 생각도 없지만). 그런데 박상영이 이번에 낸 에세이에는 나를 너무나 부끄럽게 하는 고백이 많았다. 일단 그도 직장인이었다. 매일같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출근을 했다. 이밖에 다른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박상영은 서른이 넘도록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그가 가진 다른 많은 조건보다 내가 훨씬 더 좋았다. 문제집 없다고 공부 못한다는 내가 있는데, 알고 보니 박상영은 문제 풀 연필도 없었다. 아까 그 시소를 다시 보니 박상영 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있었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결코 아름답지 않더라  

쥐구멍보다 몸이 훨씬 큰 데다 주소를 몰라서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갈 순 없겠지만, 그래도 쥐구멍을 찾지 않은 이유는 겨우 궤도를 찾아 들어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허튼짓을 하다가, 어제 어쨌든 작가라는 이름으로 계약서 두 건에 사인을 하고 나니 드디어 뭔가가 시작됐다는 기분... 은 커녕, 자고 일어나 습관적으로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둘 다 내가 '갑'이라는 사실에 잠깐 기뻤다).


원고 마감 때문에 매일 회사 가기 전에 새벽 시 반, 다섯 시에 일어나 모니터를 켜고 퇴근 후 집에 오면 다시 모니터를 켜는 생활을 2주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짓을 어쩌면 계속해야 되는 거구나 싶었을 뿐. 매주 목요일마다 네이버 페이지에 올리는 요리 에세이도 올리기 힘들 때가 많았다. 도저히 내 마음이 말이 아니어서 자기 마음도 못 살피는 주제에 요리로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게 기만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글에 달리는 칭찬이 내 것 같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틀 전에는, 회사에서 힘들어 모니터를 보며 눈물을 왈칵 쏟으며 일하고 있었던 때라 연재고 뭐고 다 모르겠고 "오늘은 하루 쉬어갑니다"라는 공지를 띄울 생각이었다. 그 공지 띄울 시간도 없이 바쁘다가, 집에 와서는 밤 11시가 넘어서 평소처럼 연재를 했다.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다른 연재도 도저히 한 문장을 쓸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새벽에 일어나 모니터만 보며 앉아있다 출근했다. 시급으로 치면 작가처럼 박한 시급도 없구나. 앉아있는다고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앉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앉아있다. 여섯 시간이 지났다. 다음 주부터는 화요일 연재까지 시작되어서-<설익은 마음엔 이런 걸 드세요>라는 코너로 연재합니다- 주말이라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넌 재미있는 걸 해서 좋겠다"라던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니"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니, 내가 박상영을 보던 시각이랑 비슷할 테지. 화요일 연재, 목요일 연재, 평균 100개의 댓글 피드백, 책 마무리, 그리고 새로운 책 기획과 시작을 다 해내면서 직장인일 수가 있냐고. 있다. 박상영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해냈기 때문이다(못 해낼까 봐 얼른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틀 전, 힘든 그 마음으로 올린 글에 달린 댓글 하나를 옮겨본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이 있습니다...(중략) 성장을 하고 있어서 기쁘지 않습니까?"


나의 솔직한 대답은 기쁘지 않습니다, 이다. 멀리서 봤을 때는 질투가 날 만큼 하염없이 아름답게 보이던 목성의 띠가, 가까이 가고 싶다는 가느다란 염원을 놓지 않은 덕분에 겨우 한발 다가갔더니 이게 뭐야 싶은 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덩어리랑 먼지랑 얼음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랑 먼지랑 얼음을 가지고 뭔가를 내놓아야 하니 오늘도 이렇게 모니터 앞에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목성의 띠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누군가의 책을 펼치면 글이 막 날아다니는 이유는, 어떤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인 이유는, 쓸모없는 돌멩이랑 먼지랑 얼음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고 애쓴 돌멩이랑 먼지랑 얼음 같은 사람들의 순진함과 미련함 때문인 것 같다. 이걸로도 뭔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믿는. 으이그, 바보들.


여기 바보 하나 추가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박상영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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