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Jun 27. 2020

글쓰기를 글쓰기

어느 날 그린 그림


새벽 다섯 시, 겨우 일어나 신문사에 보낼 원고를 만졌습니다. 모 일보에서 제 책을 소개해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저자가 직접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코너로, 200자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의 그리 길지 않은 글입니다. 쉽게 쓰겠지 싶어 회사일이 바쁜 가운데도 덥석 오케이 했는데, 무려 삼일 동안 틈틈이 원고를 만지는 제 모습을 보며 새삼 '와, 이렇게나 어려워하면서 책 한 권을 어떻게 썼지?' 싶은 거예요. 해도 해도 어려운 게 글쓰기구나, 도무지 쉬워질 리가 없겠구나... 마감을 맞추느라 비몽사몽한 가운데 잠깐 들었던 생각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쓰세요?  

'글쓰기'란 대체 뭘까요? '잠자기' '밥 먹기'처럼 그저 명사와 동사의 결합인 것 같은데, 글쓰기를 잠자기나 밥 먹기와 같은 범주로 묶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에게 "글쓰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은 더러 있지만, 잠자기나 밥 먹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하는지를 묻는 분은 없었거든요(전 잠자기나 밥 먹기를 잘하는데 말이죠). 글쓰기는 도대체 뭘까,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히 다음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좋은 글'이라는 건 과연 뭘까. 종종 받았던 "글쓰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요?"라는 질문을 바꿔보면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요?"일 테니까요.


출간 후에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묻더라고요.

"넌 글을 쓸 때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글쎄요.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내가 쓴 문장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던 거 같아요. 이번에 제가 쓴 책은 사찰요리에 관한 에세이니, 레시피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음식에 대한 철학과 정보가 녹아 있을 수밖에요. 제가 스님도 아니고, 사찰요리 전문가도 아니니 교정을 볼 때마다 '이게 맞나?'라는 의심이 드는 거예요. 제 책에 잠깐 언급되는 <음식디미방>은 대부분의 포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요리책'으로 다루고 있는데, 혹시나 싶어 나무 위키를 뒤적여보니까 그 사이에 다른 요리책이 발굴된 걸 알게 되었습니다. 채수에 호박을 넣어도 된다고 써놓은 문장을 몇 번이나 그냥 넘기다가 마지막 교정을 볼 때, 뭔가 서늘했어요. '호박을 넣어도 되나?'라는 의심이 들어서 스님께 부랴부랴 확인을 해보니 절대 넣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잡아낸 문장이 여럿 있었는데, 그런 걸 발견할 때마다 진짜 심장을 누가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누가 책을 보고 채수에 호박을 넣으면 어떡해요. 뭐 건강에 해를 끼치는 대단한 일이야 아니겠지만, '책을 읽는 누군가는 작가를 신뢰하고 삶으로 옮긴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너무 서늘해서 함부로 쓸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서 "1인 출판하세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잠을 못 자고 악착같이 교정을 봤어요. 두 번 다시 요리책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요(레시피 북 펴낸 분들을 무한 존경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글쓰기를 '재능'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스스로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허세도 있었고, 그 허세의 크기만큼 노력을 안 했어요. 이 정도면 잘 쓰는 거 같은데 왜 안 알아주지? 하고요(쥐구멍 어딨니). 글쓰기가 정말 꾸준히 쌓아 올린 노력의 산물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면 아마 (노력해서) 더 일찍 작가가 됐거나 (노력하기 싫으니까) 더 일찍 포기를 했을 건데, 지금 딱 책 한 권을 낸 위치에서 진짜 놀라운 건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 거예요. 제 주변만 해도요. 그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정말로 깜짝깜짝 놀랐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제가 몇 주간 그림을 배울 때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데생 대회를 나가면 딴 애들은 그냥 대충 그리고 노는데, 전 잘 그린다는 칭찬도 늘 들었고 상을 받고 싶어서 악착같이 그렸어요. 여느 날처럼 대회에 나가서 그림을 막 그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뛰노는 친구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와, 쟤들이 놀아서 다행이지. 쟤들이 나만큼 악착같이 그리기 시작하면, 내가 과연 쟤들보다 잘 그릴까?' 그 생각하니까 뒷골이 서늘했어요."


그렇게 잘 쓴, 그러나 꾸준히 이어지지 않은 글을 읽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감정도 비슷해요. 이렇게 잘 쓰는 애였니? 정말 놀랍고, 아씨. 나 놀면 안 되겠다. 뒷골 서늘하고, 이렇게 잘 쓰는데 왜 계속 안 쓰지? 궁금하고.



왜 쓰세요?

어젯밤에 다른 출판사에서 열 독자 강연회를 다녀왔어요. 제가 그 책 팬이기도 하고. 질의응답 시간에 제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어요(질문을 하면 제주산 초당옥수수를 주는 것도 조금 작용했습니다).

"쓴 책이 맘에 안들 때도 있고, 읽어보니 재미없을 때도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계속 쓰시는 이유가 뭔가요?"


한 작가는 1) 생계를 위해서 2) 더 잘하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고, 또 다른 한 작가는 3)다른 일을 하려고 노력해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계속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이것의 반대 아닐까요. 생계와 크게 관련이 없거나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 하는 일이 글쓰기 말고도 많아서.


저는 글쓰기를 전공으로 한 사람이 아니에요. 따로 배워보거나 한 적도 없고, 그냥 좋아서 계속 써온 케이스거든요. 그래서 마음 한편에는 늘 이런 생각이 있었어요. "나도 문학을 전공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대학원에 가봐야 하나?""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만 모르는 글쓰기의 대단한 '비법'같은 게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다들 나 몰래 라면수프 하나 몰래 챙겨서 쏙 넣는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맹물에 간장만 때려 부으면서 끙끙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글을 읽고 내게 되돌아오는 말들 때문이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좋았어요, 많이 위로가 됐어요... 그런 말들을 받으면 계속 쓸 수밖에 없어요. 가장 아끼고 소중한 것들을 줄 수밖에 없거든요. 주머니에 예쁜 유리구슬을 가지고 있다가 꺼내서 줬는데 너무 많이 좋아하면, 아끼는 유리구슬이지만 다른 색깔도 꺼내서 주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이것도 너 가질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볼게요. 글쓰기가 뭐냐. 저도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만화가 하일권 씨를 좋아하는데, 그분이 연재 후기에서 "18년쯤 만화 그리고 나니까 만화가 뭔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위에서 말한 미술 선생님도 "25년쯤 됐는데 고민이 돼요. 진짜 좋은 그림이 뭔지"라는 말을 하셨고요. 그러니 글쓰기가 뭔지, 좋은 글이 뭔지는 저도 당연히 모르지요. 한 70쯤 됐을 때는 대답할 수 있을는지.


제가 글쓰기를 떠올리면 좀 투박하지만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과거 보는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져요. 그때는 글쓰기를 잘해야 명예도 얻고, 돈도 버는 거잖아요. 과거시험 합격하려고 낙방에 낙방을 거듭하면서 평생을 바친 사람들도 전국에 여럿이니까 얼마나 치열해요. 내가 과거 보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을 해보거든요. 벼루에 먹 갈면서 붓들고 초조하게 시제가 뭐 나올까 기다리는데, 내가 모르는 게 나오면 얼마나 난감하겠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자기가 시제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어요.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걸로 쓰면 돼요. 저는 유행하는 소재를 못 써요. 제가 잘 몰라서요. 그것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고, 저보다 잘 쓰는 사람도 너무 많아서 저는 그 사람들보다 잘 쓸 자신이 없어요. 오늘의 글쓰기는 자기가 혼자 치르는 과거시험인 셈인데, 이 시험을 합격한다고 해서 옛날처럼 명예도, 돈도 따라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도 해봐야겠다면 '어떻게 잘하냐'는 방법보다는 계속할만한 스스로의 이유를 먼저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 이유만 찾아지면 태도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유와 태도만 있으면, 좋은 글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첫 책 출간 5일 만에 재쇄를 찍게 됐습니다. 초판이 꽤 많은 부수였거든요. 그때야 알게 됐어요. 아, 내 방식의 글쓰기가 틀리지 않았구나. 내 문장에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태도), 그리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유)만 있으면 꼭 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내가 잘나지 않아도 괜찮구나. 아, 정말로 다 괜찮구나.

책을 내고 나서 준비과정 동안 썼던 짧은 몇 개를들춰봤는데, 이런 글이 있어서 공유합니다. 오늘은 아래의 글로 마무리할게요.



*제목은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를 차용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내 말씀] 스님과의 브런치 구매자 분들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