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옴니 버스

#03.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by 꽃반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확신에 찬 듯 보일 때가 있다. 확신에 차서 걷고, 확신에 차서 메뉴를 주문하고, 확신에 차서 누군가를 사랑한다. 사람들 모두 확신에 차서 어디론가 향하는 듯 보일 때, 나만 그 자리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노래 가사처럼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를 외치고 싶은 그런 하루가 종종 찾아오면 나는 어물쩍 버스에 몸을 싣는다.


저 이번에 내려요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탔던 때를 기억한다. 아마 여덟 살 즈음이었는데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뒷목이 빳빳하게 굳는다. 몇 번을, 어디서 타야 하는지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기한 데다 엄마의 당부까지 수차례 더해져 잊으래야 잊을 수도 없었지만, 정작 내리는 법을 몰랐다.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져서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버스는 승차가 다가 아니라는 걸, 하차를 해야 비로소 완벽한 버스 타기라는 걸 왜 엄마는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내리려면 벨을 눌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리기 전에 벨을 꾸욱 누르는 어른들의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벨을 눌러야 하는 타이밍 같은 건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단 말이다. 정류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혔다. 여기서 못 내리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그날따라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엔 아무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뒤따라 내리겠다는 여덟 살 나름의 술책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뒷문만 바라봤다. 문은 천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동굴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치려는 찰나, 눈을 질끈 감고 벨을 눌렀다.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흘끗 나를 보고 물었다.

"여서 내릴 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에"

“담부턴 미리 눌르라. 알겠나?” (그 ‘미리’가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마침내 천년 동굴의 입이 열리고 나는 버스에서 쏟아지듯 황급히 뛰어내렸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는 혼자서 버스를 타지 않겠다는 다짐과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알맞게 뒤섞인 울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믿기 힘들어하지만, 어릴 때의 소심함을 이야기할 때 자주 소환하는 이야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진짜라니까. 나 어릴 때 너무 소심해서 버스에서 벨도 못 눌렀다니까 그러네.”


저 이번에 못 내려요

내려야 할 곳에 못 내릴까 봐 전전긍긍하던 어린이는 어른이 되었고, 상황이 좀 바뀌었다. 커서도 여전히 버스를 타지만, 이젠 내려야 할 곳에 내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어른이 되었다. 회사로, 집으로, 회사로, 다시 집으로.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나를 퉤 뱉는다. 내가 할 일이 있는 곳,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마조마하다. 출근하면 업무가 쌓여있고, 퇴근하면 빨래와 설거지가 쌓여있다. 퇴근 무렵, 앉을자리 하나 없는 빽빽한 틈을 간신히 비집고 서서 도로를 꽉 메우고 있는 차창밖의 수많은 자동차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간절히 소망한다. 여기가 우주이기를. 어둠을 가르는 저 붉고 긴 불빛들은 우주선의 불빛이기를. 난 애써서 무언가를 해내는데 지쳐버렸으니 평생 이렇게 버스, 아니 우주선을 타고 있었으면. 내가 탄 버스가 아름답고 멋있는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 주기를. 하지만 항상 현실을 걱정하는 또 다른 나는 우주로 내빼려는 나를 기어이 버스에서 끌어내린다.


자꾸만 눈물이 나서 훌쩍거리다가 내릴 정거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울 이유도 없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내가 한심 했던 건지, 그런 나를 한심해하는 나 자신에게 서러웠는지, 아니면 그저 내릴 정류장을 한참이나 지나쳤다가 다시 집으로 가야 하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던 건지 어쨌든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울었다.

2017년 8월 11일


가끔 그렇게 명확하게 내릴 정류장을 알고 있었던 그때를 떠올려본다. 내려야 할 곳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거기는 어디였을까. 나는 무얼 하기 위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버스를 탔던 걸까. 이제는 딱 한 정거장 전에 하차벨을 누를 줄도 알며, 대부분의 경우 - 종종 놓치기도 하지만-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내린 곳이 정말 내가 가야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다.


창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바깥을 내다보면, 모두 맹렬한 속도로 일제히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어떻게 다들 저렇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가 가야 하는 곳을 잘 알까? 사정은 버스 안도 마찬가지다. 정거장마다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내리고 또 올라탄다.


나는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려는 걸까. 내려서 뭘 하려는 걸까, 뭘 하고 있는 걸까. 기사 아저씨가 "여서 내릴 끼가?"하고 묻는다면, 이번에 나는 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2. 버스에 해당되는 글 179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