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옴니 버스

#04. 앞좌석에 타고 있나요?

by 꽃반지


"우린 그럼 여기서 쿨하게 헤어지자."

"알았어요. 담에 또 보자고."

작은 독립서점에 들러 잠깐 시간을 보내다 대구행 버스 출발시간이 다되어 엄마가 먼 일어났다. 어젯밤, 대구에서 강릉으로, 서울에서 강릉으로 각자 버스를 타고 달려와 짧은 모녀 상봉을 하고 났더니 금세 헤어질 시간이다. 서점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인 데다, 서울행 버스가 출발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있어서 나는 서점 남기로 했다. 입구에 서서 저벅저벅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데, 금세 눈앞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가 한번 뒤를 돌아봤을 때는 크게 손을 흔들었지만, 두 번째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엄마 쪽으로 달려가는 중.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바짝 올려 썼다. 이럴 땐 마스크가 고맙다.

"왜? 서점에 있으라니까."

"책 보는 거보다 데려다주는 게 더 좋아서."

"하여튼 마음이 여려..."

엄마는 내가 마음이 여리다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어제저녁으로 잡혔던 회식이 갑자기 취소됐다. 그다음 날이 마침 연차라 그냥 집에서 쉴까 하다가, 어디라도 가고 싶어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첫 장에 '나의 어머니께 드린다'라고 떡하니 적혀있는 나의 책도 아직 전하질 못했으니. 서울과 대구의 중간지점인 대전을 놓고 고민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강릉으로 정했다. 퇴근 후 버스를 타고 밤늦게 강릉에 도착했더니, 먼저 도착해 한참이나 나를 기다렸을 엄마가 환하게 맞아주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오지 말고 숙소에서 기다리란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티비를 켜놓고 근황을 얘기하던 엄마는 내가 늘 봐온 모습대로 먼저 곯아떨어졌다. 티비 소리도 시끄럽고 불도 훤하게 다 켜져 있는데 어쩜 이렇게 잘 주무시나. 엄마는 항상 나를 보면 "불면증이 있어서 잘 못 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장소가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잠에 빠지는 데다 한 번도 안 깨고 푹 자는 엄마 모습을 보면 '불면증'의 의미를 이 분이 잘못 알고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 오히려 잘 못 자는 건 나다. 여느 때처럼 밤새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공간을 울렸다. 잠을 설치다 일어나 보니 푹 잔 얼굴의 엄마가 조식 먹으러 가자며 날 재촉한다. 새벽 여섯 시다. 끄응.


체크 아웃 후, 엄마 친구의 표현을 빌리면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있는 집', 스타벅스 2층에 앉아서 음료를 시키고 비 오는 강릉바다를 바라봤다. 파도와 함께 졸음이 밀려온다.

"근데 왜 자꾸 불면증이라고 해요? 그렇게 잘 자는데."

"내가 니랑 있으면 안심이 돼서 그런가 봐. 보호자가 있는 느낌... 대구 가면 늘 긴장하고 있더라. 나도 모르게."

보호자. 보호자라는 말을 들으니 무심결에 후추를 들이마신 것처럼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저 혼자 시끄럽게 울리는 티비를 끄고,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낯선 도시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잠든 엄마의 배에 이불을 덮어주면서 느꼈던 그런 매캐한 마음.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그려진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 나도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은 사람인데."


... 안도감이라는 감정을 부모님의 차 뒷좌석에서 잠을 잘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중략) 사람은 훗날에야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 사무치는 아픔을 느끼기 마련이다. 어른이란 영원히 앞 좌석에 앉아야 할 운명이다.

<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서 잠든 순간을 기억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른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묵묵한 어깨 한쪽이 보인다.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한숨 자." 얄팍한 생각이지만, 운전을 배우지 않으면 운전대를 잡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좌석의 어려움일랑 하나도 모른 채 그저 편안할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를 뒤에 태우고 달리는 마음의 무게는 평생 내 몫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운전을 잘할 수 있는지, 운전을 하다 지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운전대를 놓고 싶을 땐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갑자기 사고가 났을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같은 건 나와 상관없기를, 내 몫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빼도 박도 못하게 어른이 되었다'라는 어느 날의 메모처럼, '어른이란 영원히 앞좌석에 앉아야 할 운명'이라는 문장처럼, 정신 차려보니 운전대를 꼭 쥐고는 앞좌석에 앉아 우왕좌왕 우물쭈물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거다. 먼저 잠든 엄마를 보면서 맡았던 매캐한 마음의 냄새는 앞좌석의 냄새였던 거다. 어른만 맡을 수 있는 냄새. 평생 운전대를 꼭 쥐고는 놓을 줄 몰랐던 엄마가 슬금슬금 뒷좌석으로 옮겨간다. 비로소 뒷좌석에 앉아 마음 놓고 졸기 시작하는 것이다. 슥슥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꾸벅꾸벅 조는 엄마에게 "한숨자요"하고 말하는 누군가가 비로소 있는 것이다.


자꾸만 먼저 가라는 엄마에게, 엄마가 버스 타는 걸 보겠다고 함께 앉아있었다. 마침내 엄마가 타고 돌아갈 버스가 왔다. 엄마가 "간다!" 하면서 손을 흔들고는 버스에 올라탔는데, 겨우 참고 있었던 눈물이 마스크를 타고 흘렀다. 버스에 올라탔던 엄마가 다시 내려서 내게로 왔다. 쿨하지 못한 유전자는 분명 엄마가 물려준 거지. 이젠 눈을 마스크로 가린다고 해도 숨길 방법이 없다. 엄마가 묻는다.

"왜 울어?"

눈물을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하고 있다가

"엄마 간다고 울어?" 하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엄마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마가 머쓱했는지 다시 "간다!"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무슨 효녀가 났어, 효녀가.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귀찮다고 약속 있다고 일 년에 몇 번도 집에 안 내려가면서 엄마 간다고 울길 울어.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앞좌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쥐곤 어쩔 줄 몰라해도, 운전실력이 엉망진창이라 벌벌 떨고 있어도, 비로소 뒷좌석으로 옮겨간 엄마는 나를 믿는다는 것. 그런 믿음 덕분에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안도할 수 있다는 걸. <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안도감이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를 믿고 곤히 잠드는 누군가 덕분에, 앞좌석에 앉아서도 안도감을 맛본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엄마를 태운 버스가 떠났다. 터미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마스크가 코까지 다 젖어있었다. "이렇게 물러 터진 보호자가 어디 있어." 내 모습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다,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는 나를 보호자로 여긴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크고 울창한 보호수처럼 듬직하지는 않지만, 나는 어느새 운전대를 쥐고 버스를 몰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야 한다. 물러 터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여린 마음을 온통 나에게 물려준 사람이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영원히 앞 좌석에 앉아야 할 어른이 되었으므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3.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