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옴니 버스

#02. 버스에 해당되는 글 179건

소소한 내 삶의 배경 무대

by 꽃반지


애초에 버스는 내 삶에 있어 선택이나 취향의 영역이 아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어딘가에 가려고 마음먹는 이상 반드시 뒤따르는 필수불가결의 존재다. 택시 타기에 대한 개인의 애호와 추억, 여러 감상을 담은 책 <아무튼, 택시>의 첫 장에서 저자 금정연은 이렇게 고백한다.

누군가 내게 택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곤란해진다. 택시는 내게 다리나 마찬가지다. 좋아하기보다는 없으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다리보다는 택시가 좋다. 다리는 내 것이지만 택시는 내 것이 아니니까.


나 역시 누군가 내게 버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곤란해지겠지. 시간 엄수가 필수인 출근길이나 중요한 약속에 나갈 때는 지하철을 타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버스를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나는

1) 운전을 못 하는 데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전혀 없고 - 무섭다

2) 차가 없고 - 1)의 이유에서

3) 지하철을 싫어하고 - 창밖이 보이지 않으니까

4) 마음 놓고 택시를 타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한 데다 - 여자라서, 미터기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후자의 비중이 좀 더 크다)

5) 나에게 겁 많은 유전자를 물려준 엄마가 툭하면 어린 나를 앉혀놓고 주문을 걸었기 때문에 - “넌 날 닮았으니까 운전하면 안 된다!”. 그 결과가 1)이다

이런 나에게 정답은 바로 버스다.


버스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억은-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에는 엄마가 나를 둘러업거나 품에 안고 버스를 탔겠지-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엄마와 함께 땡볕 아래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어느 오후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는 유일한 버스인 88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정류장마다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어서(내가 자주 가는 종로에는 터치식 LED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꼬박 1년이 지나도록 터치가 되는 줄 까맣게 모르다가 어느 날 외국인이 휙휙 자연스럽게 넘기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그가 떠난 다음에 신나게 터치터치했다!) 기다리는 버스가 어느 정류장을 지나고 있고 몇 분 뒤면 도착하는지(물론 전광판에 뜬 ‘잠시 뒤 도착’만 믿고 있다 오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지만. 너에겐 잠시, 나에겐 몹시), 타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 지, 저상버스인지 아닌지까지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버스는 언제 오는지는 물론, 어디로 향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빛바랜 베이지 바탕에 퉁명한 빨강으로 번호만 커다랗게 쓰여있었을 뿐. 그때의 내 눈엔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의 베테랑처럼 보였던 엄마도 종종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곤 했으니까. 나는 무언가를 (미련할 정도로) 잘 견디는 편인데, 아마 그 시절 버스를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기다린다’는 말의 의미를 가늠하기도 전에 몸으로 알아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사전엔 ‘기다린다’는 말 옆에 비슷한 말로 ‘참다’가 놓여있는데,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다.


유치원을 다니던 무렵의 어느 날엔 엄마, 남동생과 함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다 내리는 가운데 하차문이 닫혀 한쪽 팔이 끼인 채로 몇 정류장을 질주하기도 했다. 내려서 동생이 내 팔을 한참이나 꼭꼭 주물러주던 기억이 난다. 고3, 야자가 끝난 늦은 밤엔 시력이 좋지 않아 버스번호를 잘못 보고 올라타 종점까지 간 적도 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여느 때와 다르면 의심할 법도 한데, 나는 늘 버스를 끝까지 믿는다. 꾸벅꾸벅 졸다가 도착한 어느 공터에서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볼멘소리로 따졌다. "왜 나를 이렇게 (시력이 안 좋게) 낳았어!" 진짜 왜 이렇게 (싸가지 없게) 낳았나요.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좌석에 앉아 졸다가 굴러 떨어져 모두의 시선을 받은 적도 몇 번이나 있고, 2인용 의자를 마치 1인용으로 착각하는 듯한 쩍벌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나도 다리를 쩍 벌리고 영역싸움을 한 적도 있으며 - 그는 마침내 오므렸습니다! - 기사 아저씨가 올라타는 나를 못 보고 문을 닫는 바람에 회사 대신 병원으로 출근한 적도 있다(또 팔이 끼었다...). 이쯤 되면 버스를 안 탈법도 한데 나는 줄기차게 버스를 탄다.


글의 시작에서 버스를 ‘어딘가에 가려고 마음먹는 이상 반드시 뒤따르는 필수불가결의 존재’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영광은 지하철이 차지해야 옳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것은 언제나 지하철이다. 기다릴 필요도, 밀리는 도로 사정 때문에 밀려오는 불안감으로 동동거릴 필요도, 잘못 올라타는 실수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왜 버스를 탈까. 그 이유를 삶에서 버스를 완전히 배제했던 어느 시기에 저절로 알게 됐다. 다니던 회사가 갑작스레 이전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출퇴근으로 왕복 세 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던 시기가 있다. 반년 넘게 고된 출퇴근을 반복하다 보니 시름시름 앓았다. 몸의 피로도 피로였지만 마음의 피로가 컸다.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지하철은 (잠깐을 제외하고)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의 모습은 어떤지,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밤이면 맞은편 차창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지친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어느 날,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방 한 구석에 오래 세워뒀던 기타를 고치기 위해, 집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빵집에 가기 위해, 느닷없이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가기 위해, 차 한 잔을 마실 카페를 찾기 위해, 미뤄두었던 말을 하기 위해, 오래 생각을 하기 위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버스에 대한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건, 벌써 몇 년 전이다.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버스에 대한 나의 애호는 0.001%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도 100%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내가 버스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었다. 마침 한 개그맨이 가정 형편 때문에 끼니를 자주 국수로 자주 때웠더니, 그 모습을 줄곧 봐온 남편이 무려 30년 동안이나 그녀가 국수를 좋아하는 줄 오해하고 있더라는 방송을 봤다. 버스에 대한 나의 태도도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삶에서 익숙하고 당연한 한 부분을 과연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몇 번이나 원고를 쓰다 안 되겠다, 다른 책을 써야겠다 싶어 소재를 건지기 위해 나의 오래된 블로그를 뒤적이다가-블로그 소개글이 ‘직사광선 및 습한 곳을 피하여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중‘으로, 소개글답게 혼자서 은밀히 글쓰기를 해오던 공간이다- 문득 '버스'라는 키워드를 넣었더니 '버스에 해당되는 글 179건'이라는 검색 결과가 나왔다. 179건? 버스에 관해 무슨 할 말이 이다지도 많았나. 게시물을 하나씩 클릭해보니 버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버스에서 바라본 벚꽃, 출근길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에 대한 감상, 퇴사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내 마음의 풍경, 친구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면서 함께 나누었던 대화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버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내 삶의 작고 애틋한 순간들의 배경이 버스라면, 나는 버스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금정연 작가가 같은 책에서 '혼자 타는 택시를 가장 좋아한다'라고 밝힌 것처럼 나 역시 혼자 타는 버스가 가장 좋다.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버스 타기의 풍경은 대략 이러하다. 창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한낮, 펼친 책의 한 귀퉁이에 햇살이 살짝 걸칠 정도면 딱 적당하다. 버스는 완전히 텅 빈 것보다 사람이 하나 둘 있는 편이 좋다. 한산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취향을 맘껏 드러내며 좌석을 선택할 수 있다. 노약자석의 노란 커버가 끌린다면 이때만큼은 과감하게 앉아도 좋다. 하차문 근처에 작은 휴지통이 마련되어 있다면 마음은 더없이 다정해진다. 승객들을 위한 기사님의 말없는 배려를 느낄 수 있으니까. 차창은 말끔하게 잘 닦여있고, 살짝 열린 창으로 바람이 가볍게 들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책 한 귀퉁이에 어른거리는 햇살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 익숙한 풍경, 혹은 처음 보는 풍경이 뒷걸음질 치며 사라진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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