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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l 22. 2020

상처 후에 오는 것들


주고 또 받는다 

"저 상처 받았어요."

출근하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과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러내 한 말이다. 너만 받았어요? 나도 받았어요!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불쑥 올라왔지만, 일단 삼켰다.


서로 날이 서있다. 일은 바쁘고 팀에 인력은 없다. 내가 입사한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서로의 손발 삐그덕거린다. 성격이 다르고 업무 스타일이 다르다. 모든 걸 새롭게 맞춰가는 중이다. 게다가 일주일 만에 잡지 한 권을 마감해야 하는 이 살벌한 풍경 속에서는 말의 길이가 짧아지고, 말이 머금은 물기가 말라버린다. 내 맞은편에 앉아 '상처 입은 채' 나를 바라보는 과장님 다치게 한 건 나의 짧고 퉁명한 농담 한마디였다. 그 말에 무려 '상처씩이나' 받았다고요? 뜨악했지만 농담의 배경을 곰곰 살펴보면 내 식의 방어였다. 상대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차마 꺼내지 못한 마음들이 어떻게든 짧은 농담 한마디라도 타고 나 것이다. 어쨌거나 상처를 줄 의도까진 없었기에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렇게 받아들이셨을 줄은 몰랐어요."


상처 입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밤 퇴근하며 과장님의 말과 행동에 상처 받았다. 쫌팽이같은 마음이지만 오늘 아침 출근하며 다짐했다. 한 일주일 동안 과장님과 말을 섞지 않으리라(출근할 때 기껏 이런 걸 다짐한다). 어차피 업무야 사내 메신저로 이야기하면 된다.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불려 가는 바람에 계획은 1초 만에 무산되었지만.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이의 말을 들으며 들었던 최종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다들 얼마나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나. 그렇게 애썼는데도 바늘구멍 같은 틈새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어느새 사막처럼 넓어진 상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나. 애썼던 것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때 드는 감정은 분노와 슬픔, 허무함 같은 나른하고 뒤끝이 씁쓸한 감정들이다. 또다시 이렇게 상처 받는 나에게 분노하고 노크도 없이 나를 상처 주는 상대에게 분노하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대상을 알 수 없는 화를 내다보면 서글퍼진다. 마지막에 남는 건 눈물 흘릴 힘 없이 무기력한 몸과 마음. 그래서 상처 앞에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상대에게 고마웠다. 그동안 내가 상처 앞에서 가질 수 있었던 감정의 목록 중에 '고마움'은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상대방도 나에게 상처 줄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행동하진 않았을 테니까. 상대방에 나에게 상처 받았음을 이야기 하기에, 나도 이래서 그랬던 것 같다나의 상처를 말할 기회를 얻었다.



상처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지난 주말, 오랜만에 전 직장 동료를 만났다. 일찍 결혼한다 싶었는데 얼마 전 몇 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헤어질 무렵 그가 가만히 말했다.

"연애를 할 때는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비일상인데, 결혼을 하고 나니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려서 그런 걸까?"


집으로 오는 길에 그 말을 곰곰 생각해봤다. 일상과 비일상. 일상은 익숙하고 그래서 결국 지겨워지고, 비일상은 낯설고 특별해서 설레는 걸까. 내가 물론 당사자가 아닌 데다 두 사람의 입장을 고루 들어본 건 아니니(게다가 난 미혼이기도 하고) 결혼생활이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잠깐 전해 들은 그의 이야기에는 배우자로 인해 상처 받은 순간들이 많았다. 일상과 비일상이 문제가 아니라 실은 주고받은 상처의 총량이 문제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가늠해봤다. 일상이란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길로만 다닐 수 없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돌부리가 튀어나오고, 갑자기 바퀴에 바람이 빠지고, 예보에도 없던 광풍이 정면으로 불어닥쳐 눈을 감고서 자전거를 타야 하는 날도 있다. 우리의 일상에는 그래서 상처가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상이 자전거 타기와 다른 점을 한 가지 꼽는다면, 그건 바로 내릴 수 없다는 것. 가끔 샛길로 새거나 멋진 장소를 발견해 쉬어가더라도 다시 우리는 일상의 두 바퀴를 굴려야 한다. 매일의 생활에는 상처의 몫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일상에 마련된 상처의 몫이 기쁨의 몫보다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상처가 덜한 비일상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일상에 상처가 깃드는 것과 상처투성이 일상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


가벼운 농담에, 별생각 없는 행동에 우리는 묵직한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받지 않을 방법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러니 상처를 받았을 땐 "나 상처 받았어요!"하고 상대방에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좀 더 건강해질 기회 얻는다고 믿는다. 앞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 주의하는 상대방이라면 관계를 이어나갈 만한 사람이다. 그깐걸로 상처 받냐, 너는 나보다 더하다 등의 말로 사과가 아닌 비난이나 질책을 돌려주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에 더는 시간과 마음을 들일 이유가 없다. 과장님의 '상처 커밍아웃'이 있었던 그날 저녁, 우리는 야근을 빙자해 간단하게 소주를 곁들이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앞으로 좀 더 조심할 것이고 과장님도 그러기를 바란다. 상처 앞에 보다 담담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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