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Aug 19. 2020

회색에 핑크가 깃들 때


지난 주말, 비로소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몇 달 전부터 보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마감이 임박해서야 서둘러 다녀왔어요. 전시 제목은 <모네부터 세잔까지>. 10년 전에 영국에서 우연히 모네 그림을 본 뒤로 마음을 홀딱 뺏겼거든요. 세계적인 거장들의 그림이 벽마다 빼곡히 걸린 영국의 미술관에서 촌스럽게 '오, 이거 다 진짠가?'라는 의심을 품고 드넓은 전시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는데, 유독 마음을 끄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림 가까이 다가갔다가 몇 걸음 물러섰다가 그렇게 한참을 그림 앞에 서있다 떠나기 전에 화가 이름을 확인했더니 모네였어요 시험 치느라 교과서 지우개 크기만큼 실린 그림을 보고 작가 이름을 외우기 바빴지, 왜 모네가 유명한지는 줄곧 모르다가 그때서야 알게 됐습니다. 모네라서 이 그림이 유명한 게 아니라, 이런 걸 그린 사람이라서 모네가 유명한 거였구나. 그림이란 게 이렇게 좋구나, 하고요. 그때 미술관을 떠나면서 순진하게도 '해마다 와서 봐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그게 벌써 십 년 전이 돼버렸어요. 그러니 모네 원화가 모처럼 한국까지 왔는데 안 가볼 수 있나요.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흙 색깔이 핑크

<모네부터 세잔까지>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입니다. 오픈전부터 도착해 기다렸다가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모네의 그림으로 직행할까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어서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인상주의는 말 그대로 인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스타일이에요. 기존에는 정형화된 것, 완성된 스타일이 주축을 이뤘다면, 인상주의는 자기가 보고 느낀 대로 그리는 거죠. 찰나의 빛, 색의 변화, 물결의 움직임처럼 섬세하고도 순간적인 것들을 포착해 자기만의 스타일로 그려나갑니다.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공사장. 땅 파는 인부들을 그린 그림이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노동은 고되고 고된 중에 더 고된 노동이 있지요. 줄곧 그 앞에 머물렀던 이유는 흙이 핑크색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부의 바지는 밝은 노랑으로 경쾌하게 빛나고 있었거든요. 이백 년 전 서양의 지질은 핑크색 흙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면, 그림으로 미루어보건대 여기나 거기나 노동은 고되고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같은 거라면, 사실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일상의 장면이라면, 튀어 오르는 핑크와 밝게 빛나는 노랑은 어찌 된 일일까. 


모두가  이미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흠없이 완벽하게 그리려 할 때 공사장에서 아름다 길어 올리는 시선이 있습니다. 공사장뿐인가요, 기차에서 피어오르는 희뿌연 연기에는 알록달록 무지개가 흩뿌려져 있습니다. 선로를 놓는 인부들은 분주하고요.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이, 건초더미를 긁어모으는 여인이, 비에 젖어 조명을 반사하는 번들거리는 거리가 뭐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그걸 그렇게 열심히 그려놨어요.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하나도 아름답지 않던 것들이, 어느 누구의 눈길 잠깐 잡아끌지 못하던 무심한 풍경들이 누군가 아름답다고 그려놓으니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도록 기억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습니다.


인생, 영원히 아름답기

그림은 바라보는 즉시 어떤 정서를 환기시킵니다. 순식간에 보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요. 핑크색 흙을 파는 공사장 인부, 낚시하는 어부, 보라색 꽃이 가득한 숲을 바라보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그렇지만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관객은 그림을 오래 바라보지 않지만, 캔버스 가득 화가의 붓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떤 부분은 힘을 주고, 어떤 부분엔 힘을 빼면서 화가의 눈이 바라본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는 고도의 기술이지요. 모네의 가장 대표적인 '수련 연작'은 모네가 무려 20년 동안 수련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입니다. 빛 아래 색의 변화를 관찰하느라 그는 눈이 멀 지경에 이르는데, 저는 감히 모르겠어요. 한 사람이 20년 동안 무언가를 바라보면 어떤 세계가 보이는지.


아침이라 제법 한산한 전시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술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저의 경우엔 글쓰기죠. 사실 안 써도 누가 뭐라고 안 하거든요. 써야 될 이유도 딱히 없고,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매일이 참 고만고만해서 쓸 것도 없어요. '에이, 할 말도 없는데 내일 쓰지 뭐.' 하다 보면 일주일은 우습게 지나가고요. 벽에 걸린 그림 중 물고기 잡을 채비하는 어부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거기에 출근하는 제 모습을 넣어봤는데 되게 싫은 거예요. 지하철에 설 자리도 없어서 겨우 발 한 짝 욱여넣고, 환승 빨리하려고 세렝게티 초원의 톰슨가젤처럼 뛰는데 그게 예술이 될 수가 없는데, 그래도 그 장면을 이왕이면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하겠지 싶었습니다.

 

굳이 아름답지도 않은걸 왜 아름답게 그리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저는 예술의 존재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굳이 안 해도 될걸 하고, 굳이 다른 걸 선택해도 될 것을 그러지 않는 거죠. 그런 태도가 작가 스스로를 살 수 있게 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믿어요. 부처는 인생은 고해라고 말했지만, 예술은 고해도 살아볼 만하다는 착각을 안겨줘요. 인생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거죠. 저는 착각을 안겨주는 시선을 흠모하고 사랑해요. 시실 입구 벽면에 글귀가 하나 쓰여있습니다.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한 점의 그림 앞에서 저 먼 과거와 현재가, 지구 반대편의 풍경이, 십 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얽힙니다. 배를 어루만지는 어부의 그림자 위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내 모습을 포개 보고, 앞으로의 생계와 작가로서의 삶을 고민하는 그 당시 그들의 고민이 나와 다르지 않음에 작게 안도합니다. 아름다움에 골몰했던 그들 역시 직장을 잃기도 하고, 병을 앓기도 하면서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인생의 민낯을 마주한 채 살아갔을 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것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전시실을 나서면서 벽면에 커다랗게 인쇄된 폴 세잔의 눈동자를 슬쩍 만지고 나왔습니다. 시선을 좀 빌리고 싶어서요. 그들처럼 일상을 좀 더 촘촘하게 보고, 물기를 더해 촉촉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나의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한 거라는 착각을 안겨줄 수 있다면, 그럼 저도 핑크빛 착각을 부지런히 길어 올리면서 그 보람으로 살겠요. 늦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빗속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