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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26. 2020

잘 무너져봅시다, 우리

뛰어봐요!


지난 주말, 그간 조금씩 수정을 해오던 두 번째 책 교정본을 출판사에 보냈다. 보내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책이 밀도 가득한 단단하고 묵직한 빵 같은 책이었다면-그래서 뭘 이리 꽉꽉 눌러 담았느냐며, 엄마가 보낸 반찬통 같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번 원고는 바람이 숭숭 들다 못해 바람이 몇 번만 더 왔다 갔다 하면 와르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 같았다. 원고 작업을 하던 토일 주말 내내 동네의 카페에 있었는데,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던 아는 얼굴이 "이번엔 무슨 원고예요?"라면서 내쪽으로 조금 가까이 당겨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화들짝 덮어버렸다. 온갖 부끄러운 것들을 잔뜩 써놓은 일기장을 들킨 것처럼. 그 순간 둘 다 무안해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상태의 원고를 보내는 건 싫지만, 어쨌든 계약은 이미 된 데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으므로 약속에 책임을 져야 한다. 출판사의 상황으로 출판이 바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답을 받고 나니, 다시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이런 상황을 다행스러워하면서 작가라고 불려도 되는 건가.


여느 직업이나 그렇겠지만, 작가라는 직업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특히 힘든 직업이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사무실에선 표정과 목소리를 적당히 꾸며낼 수 있지만, 문장에는 그 사람낱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장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는 그늘 한점 없어 숨을 수도 없다. 몇 년 전에 어느 소설가분이 "문장은 (그 사람의) 지문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들을 당시에는 상투적인 비유 정도로 여겼던 그 말을, 직접 문장을 쓰고 또 문장을 읽을수록 여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말은 '일 더하기 일은 이'와 같은, 지극한 사실을 덤덤하게 담고 있었다.

 

'좋은 문장'이 뭔지 한마디로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많은 이가 공감하는 좋은 문장은 분명히 있다. 결국엔 좋은 사람이 좋은 문장을 쓰는 것이다. 좋은 문장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이 대체 누군가 싶어 책날개에 실린 작가 이력을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글 곁에서 오래 맴돈 사람이거나 뭔가를 잘 해내 보려 애써온 뚝심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한다.주변에서 물어오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냐'는 질문에 내 나름의 방법 몇 가지를 정리해서 일러주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답은 한 가지뿐이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면 된다고. '좋은 사람'이 무언지 도무지 정리해서 얘기해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대답을 에둘러할 뿐.  


무너진다

"큼, 큼" 다들 그럴 때 있을까. 옆 사람의 훌쩍거리는 기침소리에 기대 눈물을 슬쩍 흘리고 싶은 날. 한의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으려니 눈물이 흘러 베갯잇을 적신다. 울기에 적당한 장소가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뒷목에 침을 꽂은 채 모로 누워 눈물을 흘리는 상황은 썩 적절하진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침으론 더 이상 차도가 없으니 치료를 종결하겠다는 한의사 선생님의 말은 목 뒤가 아니라 심장 깊숙이 놓은 커다란 침처럼 따끔하고 깊었다. 살면서 이렇게 아파본 일이 싶나 싶게 커다란 통증이, 이렇게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2020년 8월 5일의 일기

'좋은 사람'이 뭔지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이 좋은 사람의 구성요소라는 것. 첫 책을 준비하면서 몸을 혹사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후폭풍은 예견했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나를 덮칠 것이다, 내가 몸을 아프고 괴롭게 한 것처럼 몸 역시 나를 아프고 괴롭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거지. 몸과 마음은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짝꿍과 같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진다. 몸 상태가 나락으로 계속 떨어지면서 마음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쿠쿠쿵. 몸과 마음을 잘 지키라는 말을 책에 담기 위해, 몸과 마음을 이렇게나 망가뜨린 이 아이러니는 뭔가. 처음엔 병원 몇 군데를 다니며 항생제 처방을 받았지만, 정답은 이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1)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고 2) 아무리 '바닥'이라고 스스로 나를 교묘하게 속인 들 이게 바닥이 아니라는 걸, 바닥을 한 겹만 들춰보면 폭신폭신한 엠보싱이 깔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기둥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더라도, 바닥공사만큼은 제대로 한 셈이다. 아무렴, 그동안 몸과 마음에 들인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 3) 또 하나 다행스러운 사실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내게 필요한 적절한 조언을 해줄 만한 전문적인 지식에 다정한 마음을 겸비한 분들이 많았다.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어젠 카페에서 얘기를 하다 말고 세상에서 제일 냉정하고 진지한 얼굴로 맥을 짚어주는 한의사 선생님의 눈빛을 보자, 내가 뵙자고 했으면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걸 간신히 참았다. 퇴근 후에는 나를 잡아끌고 달리기를 하는 이웃도 있지 않은가.


이왕 그럴 거면 잘 무너져봅시다

어제는 퇴근 후 방에 누워서 브라우니를 먹다 걸려온 이웃의 전화 한 통에 겨우 몸을 일으켜 달리기를 하러 나갔는데, 숨이 차도록 쌕쌕 달리다 보니 문득 10년 전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때 왜 밤마다 달렸더라? 왜 그렇게 열심히 달렸더라? 아마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내 앞에 펼쳐진 아득한 시간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 뛰었을 것이다. 영하 36도를 밑도는 온도에도 청바지 하나 입고 뛸 수밖에 없었던 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얼마 안 가 곧 무너져 내렸지만. 그 뒤로 나는 무너진 몸과 마음을 다시 짓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도 나는 또다시 트랙 위에 있고, 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한다. 어느 책에서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대도 괜찮았다'는 문장을 보았는데, 그 작가는 어찌 그렇게 의연한 건가. 땀인 척 눈물을 슬쩍슬쩍 닦고 나서 이웃과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가 물었다.

"달리면서 무슨 생각했어요?" 속을 터놓을 만큼 내밀한 사이는 아니라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요"라고 덤덤하게 대답했고 "다음엔 걱정거리를 안고서 뛰어봐요!"라는 조언을 들었다. 걱정거리를 안고 뛰라니, 거참 좋은 말이네.


"나 자신에게 화내지 마세요"

"감당할만하니까 온 거예요"

"이 고통이 내게 뭘 주는지 살펴보세요"

자기 계발서에나 나올 듯한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다. "그 고통은 내가 감당할만한 것이고,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지나갈 것이다" 내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듣기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뇨! 저는 감당 못하고요, 전 이미 너무 많이 지쳤고요, 의미 같은 건 상관없어요!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지나는 이 시기를 동화로 엮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제목은 정해두었고, 스토리 보드를 짜고 있다- 나는 정말 뭐하는 사람인 거야.


나도 안다.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내 몸이 통증을 통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그저 나를 잘 돌봐야 하는 시기임을. 이 시기를 정말로 잘 맞이하고, 잘 떠나보내고 싶다. 그리고 동화책의 에필로그에 운동장에서 눈물을 터트린 어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시간을 되돌려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똑같이 영하의 하얼빈에서 트랙을 뛸 것이고, 무너져 내릴 것이고, 애써 쌓아 올릴 것이고, 다시 무너져 내릴 테니까. 첫 책은 바람구멍 하나 없는 단단한 시간을 보내며 매달릴 것이고, 두 번째 책은 '이게 맞나'하면서 숭숭 뚫린 바람구멍을 메우느라 분주할 것이다. 세 번째 책에는 이 시기를 통해 얻은 이야기를 가장 단순하고 따뜻한 색채로 담고 싶다. 부디 좋은 문장을 담을 수 있기를 바랄 뿐. 이 글의 원제는 '그럴 때도 있어요'인데, 나와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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