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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Aug 30. 2020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손원평 <아몬드> 中


이번 주에는 세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코로나 대응 3단계로 돌입하면서 주말에 있던 대부분의 일정이 취소되었거든요. 이참에 몸과 마음을 쉬자 싶어 책만 실컷 읽었습니다. 마침 추천받은 책도 있었고요. <아몬드><천 개의 파랑><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을 읽었는데, 오늘은 세 권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책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몬드>의 주인공은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주 어릴 때 일찌감치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처럼 그는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자랍니다. 눈 앞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는 비극을 목격하지만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가리켜 '사이코패스'나 '괴물'로 부르며 달가워하지 않아요. <천 개의 파랑>의 주인공 '콜리'는 로봇입니다. 애당초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잘못 삽입된 칩 하나로 인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콜리를 대하는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합니다. "... 새로운 매니저에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말하면, 매니저의 반응은 "미친 로봇이네."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라는 문장처럼요. 로봇이 미친 거죠. 마지막으로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은 부부가 함께 쓴 에세이인데요, 이 부부의 형태가 조금 특별합니다. 아내는 과거에 남자였던 사람이고, 사랑을 늘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한 채 살아왔으나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내는" '형수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며 낯설고 뭉클했고백합니다. 남편 역시 오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데다 애당초 비혼을 선포했던 사람입니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존재,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존재, 감정을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했던 존재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모습을, 마치 항공사진을 들여다보듯 한걸음 떨어져 찬찬히 지켜보았습니다. <아몬드>의 주인공은 기계 매뉴얼처럼 외우고 습득했던 감정의 의미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알아갑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요. 콜리 역시 비슷한 행보를 걷습니다. 처음에는 콜리를 당혹스러워하던 주변 사람들이 콜리를 '살아있는'생명체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콜리 안에 저장되는 감정의 이름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면서, 콜리에겐 목숨을 던져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들이 생깁니다. 애당초 '살아있지'않는 로봇에게 '목숨을 던진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콜리는 두 번이나 자기를 죽이고 소중한 것을 지켜냅니다. 두 부부 역시 서로의 세계를 여실히 껴안으면서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중이고요.


책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분노와 증오... 그밖에 이름 붙이지 못한 다양한 감정들을 주변의 사람들과 주고 또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감정의 주고받음은 호흡처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 인식조차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물속에서 비로소 호흡을 인식하듯, 감정을 불편해하고 어려워하고 궁금해하고 낯설어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비로소 감정을 인식해요.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구나,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요. 어제는 누군가를 만났는데, 제가 그에게 어떤 잘못을 해서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답이 의외였어요. "미안하다는 말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죠? 미안하다는 말은 말하는 사람이 그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말일뿐이잖아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순간 크게 놀라 상처를 입었어요. 사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미안하다고 백 날 이야기한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듣는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지요. 감정의 주고받음에 실패한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듣는 이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이 보듬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그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요.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라고 콜리가 말했거든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가요, 꾹꾹 눌러 모른 척하려는 사람인가요, 꽁꽁 숨겨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는 사람인가요. 누군가와 감정을 잘 주고받는 사람인가요, 에둘러 숨기거나 들켜서 당황하는 사람인가요. 저는 한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목록들이 참 불편하고 불쾌했던 것 같아요.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았거든요. 품고 있자니 너무 버거운데 온전히 표현하고 전할 수도 없었어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전한 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죠. 미안하다는 말이 대체 어떤 도움이 되냐는 물음처럼요. 그래요,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감정을 표현하고 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삶에 크게 도움되는 일도 없을 거예요.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관계가 왈칵 가까워지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도 기꺼이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건넨 감정 덕분에 마침내 눈물을 쏟게 된 <아몬드>의 주인공처럼, 기껏 고물 로봇을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감정을 나눠준 주변의 사람들 덕분에 콜리가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의 무게'를 가늠하게 된 것처럼, 감정의 교류를 통해 두 사람이 마침내 부부가 되어 씩씩하게 손을 맞잡고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처럼요.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의 마지막 부분에 아주 반짝반짝하는 문장이 있어요. 그 부분을 좀 빌려볼게요.

"... 서로 다른 세계를 만날 때마다 온 마음이 저릿저릿해진다. 그 세계를 지키기 위헤, 서로를 지키기 위해, 손짓하고 불러주고 응답하는 마음들은... 우리 삶에 한 줄의 기억이 된다..."

나의 세계는 당신의 세계에 결코 가닿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닿으려는 노력, 그러니까 나의 감정을 주고 또 당신의 감정을 받고 서로를 손짓하고 불러주고 응답하는 마음들이 우리 삶에 한 줄의 기억이 되겠지요. 우리 삶에 밑줄 쳐진 한 줄의 기억, 저는 여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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