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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03. 2020

여기가 내 집이에요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 한 시간이 넘는다. 매일 아침, 그러니까 하루가 막 시작되려는 멋진 시간에 버스-지하철-지하철(물론 중간에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작은 생략)의 지난한 과정을 겪다 보면 회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다. 회사 사람들은 진즉에 이사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이사가 어디 "오늘은 이사 좀 땡기는데?"하고 배달음식 한 그릇 시키는 것만큼 간단하고 쉬운 일인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정리해야 하며, 들어가 살집을 구해야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올 사람까지 구해야 하니, 세 사람의 완벽한 합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이사인 것이다. 게다가 최근엔 심상찮은 집값 폭등으로 좀 괜찮다 싶으면 집 보러 가는 길에 계약이 성사됐다며 오지 말란 연락이 오곤 하니, 아! 정말로 이사는 맥 빠지는 일이다. 지금도 집을 막 보고 난 후다. 어둑어둑한 낯선 동네를 한참 헤맸다. 비는 어찌나 오는지, 신발도 젖고 옷도 젖고 기분까지 푹 젖어 피곤함에 절어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이 글을 쓴다.


보통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 이용해 집을 보러 다닌다.

분명 출퇴근에 드는 시간이나 체력을 좀 아껴 좋아하는 일-예를 들면 글을 쓰거나 요리하는-에 써보자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위한 행동인데 어째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이 기쁘지도 설레지도 즐겁지도 않다. 오히려 집을 하나씩 볼 때마다 실망과 좌절이 커진다.

"(가진 돈에 맞춰 집을 본 경우) 아, 역시 싼 건 이유가 있었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만용으로 집을 본 경우) 아니! 이런 집이 뭐 이렇게 비싸?"

밤하늘의 별을 헤며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담았던 윤동주 시인처럼, 나도 집을 하나씩 볼 때마다 좌절과 실망과 씁쓸함을 노래한다. 제목은 <집 헤집는 밤>.

  

버스 창문에 여전히 머리를 기댄 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게 집은 도대체 뭐지?" 갑자기 무슨 새삼스런 질문이냐며 차창에 비친 얼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집, 집, 집이란 뭐지.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이제 9년 차에 접어들지만, 집의 의미를 여전히 모르겠다. 살고 싶은 집에 살았던 적은 없다. 이미 꽉 찬 서랍에 양말 한 켤레를 기어코 욱여넣듯, 눈앞에 닥친 상황에 맞춰 집을 밀어 넣어왔다. 내 소유가 아니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어김없이 떠나야 할 이기에, 살만한 공간으로 바꾸려는 마음도 애당초 없었다. 안온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기보단 빌린 책을 조심스레 들추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다. 살만한 작은 화분 하나 놓을  주지 않았다.


최근에 동네 이웃을 사귀게 됐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집에 놀러 갔는데, 작은 원룸에 몇 가지 세간들을 갖춰놓고 알뜰하고 말끔하게 꾸려 살고 있었다. 집주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지방이 고향이라 별 뜻 없이 "집에는 자주 내려가세요?"하고 물었더니 "여기가 내 집이에요"라는, 당연하지만 단호한 대답을 들었다. 그렇구나, 여기가 이 사람의 집이구나. 이 곳은 이 사람이 단단히 뿌리를 내린, 혹은 그러고 싶어 하는 공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그렇다면 내 집은 어디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맞춰 일 년에 몇 번 겨우 얼굴을 비추는 고향집이 내 집이 될 수 없고, 빌린 책 속의 어느 문장처럼 살고 있는 지금의 집 역시 내 집이라고 말하긴 곤란하다. 꼭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에 살고 있는 이의 얼마나 마음이 묻어있느냐 중요한데 지금 이 집에선 만 3년째 살고 있지만 내 마음은 단 한 톨도 묻어있지 않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간 집을 '임시거처'라고 여기고 그렇게 대해왔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비로소 '내 집'을 가질 수 있을 라고, 그때는 그 공에 흘러넘치는 애정 묻히며 살 것이라고. 어렴풋한 신기루를 쫓는 것처럼 결혼에 나도 모르게 많은 기대를 해왔다는 걸 알았다. 결혼을 하면 나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고, 몸담고 있는 공간에, 굴러가는 삶에 좀 더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결혼이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해야 할 숙제를 하지 않은 것처럼 나를 결혼으로 내몰지 못해 채근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정말로 귓등으로도 듣지 않게 되면서야, 오히려 결혼에 대해서 자유롭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순간 내가 뭘 찾고 있는 건지 아득해질 때가 있다. 내가 찾는 게 대체 뭐지? 애정을 묻혀가며 살만한 새 집을 찾는 척 하지만, 어쩌면 내가 찾는 건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나. 열 살, 열한 살 무렵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줄거리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친구가 교실에 두고 간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는 소년의 모습만 기억이 난다(이게 줄거리의 전부였던 것 같기도 하고). 소년은 아마 끝내 친구의 집을 찾지 못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자신이 애타게 찾던 뭔가를 찾은 것 같단 말이지. 기웃기웃, 퇴근 후 비에 젖어 축축한 어둠 속을 헤매며 뭔가를 찾고 있는 나. 부디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기웃기웃. 나도 "여기가 내 집이에요!"하고 단단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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