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Aug 22. 2020

정리를 해보려고요

tvN <신박한 정리> 신애라의 집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십센치의 <스토커> 첫 소절을 흥얼거리며 집안을 둘러보니 한숨만 푹. 나도 잘 안다,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는 정리를 못한다. 못해도 정말 못한다. 방 한쪽 구석에 꽂혀있고 쌓여있고 널브러져 있는 책더미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틈만 나면 책을 사대는데다 갖고 있는 책은 아무리 재미없어도 절대 처분하지 않는 나의 성향 때문이다) 그 옆에는 옷과 양말이 한 무더기 쌓여있고, 또 그 옆에는 과자며 비스킷 상자가 몇 개나 쌓여있고, 또 그 옆에는... 엄마는 항상 나의 이런 면을 가리켜 "느이 외할머니 닮아 그런다"며 본인을 홀랑 빼버리고 당신의 엄마와 딸을 패키지로 후려치곤 했는데, 나야말로 억울한 것이 엄마 집에 가도 와 별 차이가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기 때문이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모녀가 마주 보고서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네트 너머로 주고받는다. "니가 외할머니 닮아 그런다" "엄만 안 그런 줄 아느냐". 엄마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본인은 제외하고) 나를 볼 때마다 외할머니를 언급했는데, 그때마다 길길이 날뛰며 "엄만 더하다"라고 항변하는 것도 지쳐 묵언으로 응수하곤 했다.


지난주,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하루를 묵게 되어 호텔을 예약했다. 몇 주간 퍼부은 비로 가뜩이나 덥고 습한 데다 집 정리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인데, 호텔 천장을 보며 각자의 침대에 누워 대화를 이어가다 엄마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난 게을러." 정리안 된 집에 대한 최초의 수긍이자, 외할머니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엄마 나름의 선언이었다. 게으르다... 라. 엄마가 게으른 사람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 보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서 정리할 시간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테다. 너무 바쁘니까 집구석구석 알뜰하게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 출퇴근과 출퇴근에 드는 시간을 다 빼면 하루에 고작 쥐게 되는 건 네 시간가량인데, 그 시간에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쓱쓱 싹싹 야무지게 집안을 쓸고 닦을 자신이 없다. 누워만 있고 싶을 뿐. 정리라는 거, 삶을 늘 정돈된 형태로 가꾼다는 건 실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게으르다'라는 말 대신 '에너지가 바닥났다'라는 표현을 집어넣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한때는 나도 정리 좀 잘해보자 싶어서 정리에 관한 책도 사읽고(이건 순전히 책을 좋아해서 그런 거지만) 깊은 영감을(?)을 받았으나 결국은 뭐, 갖고 있는 책이 몇 권 더 느는 정도에 그쳤다.


글을 쓰며 정리는 어떻게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어떻게'를 묻는다면 그 일은 하기 싫은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것이 생각난다. 하고 싶다면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사실 정리가 하기 싫은 것이다. 책과 빨래와 과자박스가 내 삶을 아무렇게나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은 것이다. 이사를 가야 한다고 작년부터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으면서, 이 동네 부동산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변화하고 싶다고, 오늘부터 제대로 시작해보자고 마음먹으면서도 그 마음마저 꿀꺽 삼켜버리는 사람인 것이다. 정리뿐만이 아니다. 나는 늘 질질 끈다. 변화의 순간이 필요할 때 망설임도 없이 차선을 변경하는 것처럼 신속하고 매끄럽게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는 이가 있는 반면(몹시 부럽다), 나는 늘 '이게 아닌데...'라는 망설임을 한편에 품으면서 꾸역꾸역 한다.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머뭇거림이다. 이렇게 머뭇거리기만 해서야 도대체 뭐가 되겠니! 싶을 정도로 머뭇거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는다. 나는 삶을 두려워하는 걸까? 정리 못하는 성향이 거창하게도 삶에 대한 두려움까지 닿아버렸다.


엄마와 하루 묵었던 호텔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아는 분의 배려로(서울 지리에 어두운 엄마를 배려해 엄마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셨다) 호텔에 무사히 도착해 먼저 쉬고 있던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나와서 저녁 먹자고. 엄마는 나에게 '두렵다'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 감각이 없어서 두려워". 나와서 버스 한 두 정거장만 타면 될 거리를 '두렵다'라고 말하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내 눈앞에서 마음이 뒤틀리는 장면을 눈으로 똑똑히 봤다. 엄마는 삶의 숱한 고비들을 잘도 넘어왔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깟걸로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왜 내게 두려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걸까. 나는 왜 엄마를 한없이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이렇게나 뒤틀리는 걸까. 나의 가장 싫은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했을 때의 기분 같은 걸까. 엄마가 지폐를 바꾸러 가서 못 바꾸고 허둥거릴 때, 비싼 초밥집에 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젓가락질을 할 때 나는 왜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그렇게나 뒤틀렸던 걸까. 엄마는 그런 걸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용감하고 씩씩해야 한다고, 내 어깨를 쥐고 흔들며 당당하게 살라고 내가 그렇게 키웠냐고 소리쳤던 사람이 내 앞에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서는 안 되는 거라고, 엄마 어깨를 세차게 흔들고 싶었던 걸까.


나는 이제 알았어. 한 사람의 어떤 성질이 그의 자식에게, 또 그의 자식에게 정말로 전달이 되는 거라면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려준 거라고. 늘 머뭇거려서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모든 것을 끙끙거리면서 짊어지고 살았던 외할머니는 정말로 삶을 두려워했던 사람이니까.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아파트에서 그림자처럼, 물웅덩이의 빗물처럼 가만히 고여있던 사람이니까. 엄마는 그 모습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얘기에 질색팔색을 했으니까. 그렇지만 외할머니가 물려준 삶에 대한 두려움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두려워. 아주 작은 시작도, 아주 작은 변화도, 아주 작은 좌절도, 아주 작은 흠집도 모두 두려워. 그렇지만 엄마는 나에게 선한 마음과 용기를 물려주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용기와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선한 마음, 두려움을 이기는 법이 아니라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법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사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그토록 두려워하는 사람이 그렇게 큰 산을 말없이 넘다니, 말끔하게 정리된 연예인의 집을 보면서 부러움에 마음뒤틀렸던 것처럼 엄마의 두려움을 보며 부러움이 들었던 걸까. 그래서 마음이 뒤틀렸던 걸까. 두려움과 선한 마음과 용기를 고루 물려받았으니 나도 두려워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가야 하는 운명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정리를 진짜로 시작해봐야겠다. 나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구분하고, 지난 시간과 추억을 냉큼 내다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맞이할 공간을 내 삶에 마련하는 일. 좋은 일이 더 많이 깃들 수 있도록 공간에 빈틈을 준비하는 일.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눈을 감고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