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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26. 2020

우리 가족도 함께할 수 있을까?


 혼자 산다

가족 네 명이 모여있는 단톡방이 있다. 매일의 상차림이빨리 집에 들어오라는 잔소리처럼 시시콜콜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90% 이상의 발화는 일찌감치 혼자 떨어져 지내는 내겐 닿을 리 없는 것들이어서, 상차림 사진을 보며 (영혼 없는) 쌍따봉 이모티콘을 하나 골라 보내고, 주로 동생을 향하는 잔소리엔 (역시 영혼 없는) 'ㅋㅋㅋ'을 보낸다.


고백하자면 나는 '가족'이라는 패키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걸 유난히 못 견디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혼자 있기를 유난히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공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그 배경엔 가정불화도 한몫했지만, 실은 그 이유야 어떻든 우아한 방식으로 혼자 있는 법을 택했을 것이다. 같은 배경을 공유하며 자란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집을 떠나 살겠다고 호기롭게 나갔다가 반년을 못 채우고 돌아온 반면, 나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무렵에도 층을 달리해 살았고, 유학을 갔고, 다른 지방으로 덜컥 내려가버렸고,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지내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당초 사람태생이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기에, 사람인 나는 혼자 있는 걸 원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마침내 혼자 지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연결에 대한 갈망을 품 살아간다. 헤어짐의 순간을 제일 못 견뎌하고, 배웅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터트린다. 이럴 때면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엔 잃게 될까 무서워서 지레 혼자 있는 걸 택했을지 모른다는 자아 재발견을 하게 되지만, 어쨌거나 나는 멀리 떨어져 있고 가족들과는 간간이 본다.


그게 뭐라고

업무로 바쁜 평일의 오후였다. 가족 단톡 방에 여느 때처럼 사진 몇 장이 주르륵 올라왔다. 엄마가 해인사 소리길을 걸었는데, 너무 예쁘고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따봉이나 하나 보냈겠는데, 엄마가 보낸 물음표가 내 마음에 갈고리처럼 탁 걸렸다.

"우리 가족도  길을 함께 걸어볼 수 있을까?"

물음표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가고 싶다, 가자, 갔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염원을 가득 담은 물음표라니. 물음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 "질문이 왜 그래요? 갈려면 가는 거지. 난 이번 주라도 시간 낼 수 있어."라고 답해버렸다. 평소 같으면 다들 각자의 사정을 내세웠을 텐데, 코로나를 방패 삼아 일 년째 가족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딸이 "난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라고 기세 등등하게 이야기를 하니 순식간에 모두 동의했다. ? 이게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토요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기차에 을 싣고 있었다. 첫 가족여행이다.

 

첫 가족여행이라고 명명하긴 했지만, 그동안 네 명이서 함께 어디론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정기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설날과 추석,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는 몇 번의 제사. 목적이 분명한 이동이기 때문에 가는 동안 노곤했고 도착해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역할을 했다. 남들은 일부러 간다는 해안가 관광도시가 주 목적지였지만, 목적이 끝나면 서둘러 내려오느라 가까운 바다조차 가볼 수가 없었다. 이동할 때만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단체 여행객의 기분으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같이 떠난 건 맞아도 '여행'을 한 적은 없는 셈이다.


역에 나를 데리러 온 동생의 차에 올라탔더니, 엄마는 "우리 가족도 이런 걸 하는구나"라며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이게 뭐라고, 싶으면서도 그간 묘하게 서걱거리던 관계가 비로소 한데 모이게 된 것이다. 마음 편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이니, 드디어 서로가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 "가족 된 지 삼십 년인데, 단합대회가 좀 늦네요?"하고 웃었다. 그 뒤의 풍경은 명절과 제사를 위해 떠나던 여느 때와 비슷하다. 휴게소에 잠깐 들러 간식을 먹고, 엄마가 바리바리 싸온 과일과 떡을 먹고, 사는 이야기 좀 하고, 가까운 식당에 들러 밥 한 그릇 먹었다. 다른 게 있다면 다섯 시간을 함께 걸었다는 것. 목적지를 위한 이동이 아닌 과정을 함께하 위함이었다는 것 정도.


가족의 (재)탄생

가족이란 패키지는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그저 주어진다. 운 좋게 가족과 잘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뭐 하나 잘 맞지 않고 삐걱거리는 마찰음만 요란한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각자의 가족과 불협화음이 많았던 나의 부모가 만나 만든 나의 도 그랬다. 가족의 다른 말은 '이해할 수 없음 모음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내게 가족들이 만드는 소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고, 혼자 있는 것들 좋아하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가족들은 노크도 없이 수시로 침범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과는 달리, 집안 곳곳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떡하니 함께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매직펜, 분 흙에 꽂혀있는 볼펜... 우리 가족의 모습인가 싶기도 했다. 가 이렇게 안 맞나 싶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가족들과 한발짝 떨어져 그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거리에 그제야 이해의 시선이 깃들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땐 볼 수 없었던 것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쉽게 바뀌지 않는 내 모습처럼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도 여전했다. 편하고 손이 잘 간다는 이유로(새로 사드린 건 아깝다고 모셔두고선) 어디서 구했는지 줄곧 천 원짜리 선글라스만 고집하는 엄마, 다섯 시간 산행에 '산에 가는데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기어코 구두를 신은 아버지... 그렇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유별난 나를 내치지 않고 품어준 것 또한 가족임을 알고 있다. 건강한 가족은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그 중 누구보다도 내 목소리가 크고 높았다. 나를 이해해주기를, 나에게 맞춰주기를, 나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기를, 나를 혼자 내버려두기를 외쳤다. 맑은 가을 속을 함께 걸으며 우리는 가족이구나, 하고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가족을 연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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