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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29. 2020

다들 어떻게 어른이 되셨어요?


못 먹어도 고고고?

퇴근 후 서둘러 집을 둘러보고 나온 참이었다. 알아보고 있는 지역의 부동산에도 일찌감치 말해놓았지만, 돌아온 건 "고객님이 제시하신 금액대는 도저히 없어서 금액을 올려서 찾아봤는데, 그래도 매물이 없네요."라는 씁쓸한 답변뿐. 출퇴근길에 열심히 부동산 카페를 뒤적거리다 마침 괜찮은-내 예상 금액보다 두배는 비싸지만- 매물이 있어 서둘러 연락을 했다. 집 보러 가는 사이 집이 없어진 전적이 있어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달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서글픈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애써 눌렀다.


집은 좋았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 그런지 깨끗했고 살림살이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공간의 구획도 쓰임도 좋았다. 들어서서 한번 둘러보자마자 여기는 서재로, 여기는 침실로, 여기는 옷방으로 쓰면 되겠다 싶었다. 이사 날짜도 얼추 맞았다. 얼쑤! 이제 어깨춤만 추면 되는 건가. 문제는 돈이었다. 집을 거진 다 둘러봤을 때쯤 다른 팀이 살짝 열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제가 계약할게요!"를 외쳐야 하나. 일단 집 잘 봤다는 인사를 꾸벅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 건물 앞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대출이 얼마나 나오는지, 이자는 얼마나 감당해야 되는지 가늠도 못한 채로 "못 먹어도 고!"를 외쳐야 하나 어째야 하나. 틈만 나면 내게 "지금 아니면 집 못 구해요!"를 외치는 과장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다. 퇴근 후 연락은 처음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급했다.

"과장님, 저 어떡할까요. 지금 그 집 보고 왔는데요, 마음에 드는데요, 너무 비싼데요..."

"지금 재고 따지고 할 게 없어요! 고민하는 사이에 남들이 채 간다니까요."

"그럴까요?"

"집도 안 보고 계약하는 마당에... 당장 계약하세요!"


그 전화를 시작으로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동네 시세가 얼마니, 이자는 얼마 내니,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니. 살고 있는 집에 대해 묻는 건 한편으론 굉장한 실례이고 민감한 일인데도, 하나같이 시시콜콜 알려주었다. 보증금이 얼마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대출이자는 얼마인지... 고맙고 미안했다. 결국 결론은 "네가 잘 결정해야지"였지만, 다들 그렇게 큰 결정을 턱턱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나는 카페에서 메뉴 하나 고를 때도 그렇게 고민하고 결국엔 변경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큰 결정을 내린 걸까.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걸까, 정보가 없는 걸까.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망설여도 괜찮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나 멀어서 올라타기도 전에 지하철 노선도를 보니 한숨이 푹 나왔다. 그렇지만 시간이 언제 갔나 싶게 핸드폰을 붙들고 예상 이자를 두드려 보느라 내릴 역을 지나칠 뻔했다. 앞머리가 콧잔등을 덮은 지 오래라 한 달 만에 미용실에 들렀더니 원장님이 깜짝 놀라며 "머리가 왜 이래요? 요새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출퇴근이 고퇴근 후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웃었다. 삽살개 마냥 덥수룩한 머리칼이 서걱서걱 잘려나갈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또렷해졌다. 내게 필요한 건 이사가 아니라 휴식이 아닐까. 휴식이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성격 때문이다.


결정을 잘 못한다. 스스로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나의 모습인데, 위에서도 기한 것처럼 카페 메뉴를 고르는 일만 해도 그렇다. 계산대 앞에 서서 한참이나 메뉴판을 들여다본 뒤- 물론 "저 오래 걸리니까 이따가 주문할게요!"라고 말하는 일을 잊어선 안된다- 고심 끝에 A를 주문했다가 B로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와 간신히 바꾸고 나면 아아, 역시 A였나 하는 미련이 남는 것이다. 카페에서만 그러면 다행인데 삶 전반에 대해 이런 태도라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피곤하고 후회막심이겠나. 게다가 어른이 될수록 결정해야 할 일의 목록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 각 항목이 지닌 무게가 커진다. 하루하루 나는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가지만, 결정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다음 날, 친구에게 내 상황을 말했다. 회사때문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는데 과연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회사를 잘 다니기 위한 이사인데, 생각해보지도 않은 큰돈을 덥석 빌려서 이자를 내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삶이 과연 맞는 걸까?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하는데, 왜 자꾸 나는 그런 삶에 물음표를 달게 되는 걸까. 내 말을 들어주던 친구가 대답했다. "5년 뒤의 네가 되어봐. 5년 뒤의 네가 지금의 너를 보면서 해주고 싶은 말이 뭘까? 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늘 이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후회한 적이 없어."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너한테 좀 못했나 보다."

그 말을 듣고 한 가지를 결정했다. 욕심내서 등록했다가 취소한 뒤 후회하며 대기까지 걸어놓고 마침내 운 좋게 획득한 한 자리에 등록했던 글쓰기 강좌를 취소했다. 한해의 마지막을 글을 쓰며 맺고 싶었다. 처음에 취소할 때는 알쏭달쏭한 마음이었는데, 두 번째 취소할 때는 (물론 약간의 후회는 있지만) 보다 단단한 마음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강좌는 아무것도 없는데, 지친 내 모습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이론을 배워야 한다고, 글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쁜 마음으로 남들의 템포에 맞춰 함께 창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퇴근 후 놓칠세라 달려갔던 비싼 집에 둥지를 틀고 회사를 다녀야 할지, 아니면 과감하게 좀 쉬어도 좋을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쉰다고 한들 일은 계속해야 하기에, 생계유지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이 있을 것이다(이놈의 먹고사니즘!). 현재의 나에게는 가장 무거운 결정이지만, 5년 후의 나는 또 다른 결정 거리를 안고 있겠지. 다들 하나도 안 힘들고 하나도 안 어렵고 하나도 안 망설이고 능청스럽게 어른이 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만 이렇게 오래 고민하고 거듭 고민하고 많이 고민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른도 어른 나름이지. 뭐 망설이는 어른도 어른이니까. 오늘도 내일도 한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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