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반지 Nov 02. 2020

야, 나두 소설 쓰고 싶어


으로 돌아가기 전 잠깐 중고서점에 들렀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주르륵 훑어보다 최민석 의 책을 발견했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 몇 권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었고 좋아하는 작가라 반가웠다. 서가에 꽂힌 책을 뽑아 살펴보니 그가 대학생들의 고민상담을 해준 내용을 엮은 것이었는데, 많은 고민들 중에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이 있어서 냉큼 답변을 넘겨봤다(작가가 됐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똑같지 뭐, 열심히 쓰세요. 꾸준히 쓰세요. 작가는 훌륭한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평범한 작품을 꾸준히 쓰는 겁니다. 한숨이 푹 나온다. 그놈의 꾸준히. 무언가를 꾸준히 쓴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쓰다 보면 새로운 무엇이 내 안에서 자꾸자꾸 끊임없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마른걸레 쥐어짜는 심정으로 쓰는 걸까. 사람은 자기가 이야기를 만든다고 착각하지만, 어쩌면 사람이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사람에게 찾아가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허공을 빙글빙글 배회하다가 적당한 사람을 찾아내면 "옳커니, 저 놈이구나!" 하고는 그에게 콕 찾아가 박히는 거다. 이야기가 나를 찾아와 준다면 오시는 길에 레드카펫 깔아놓고선 두 손 공손히 모으고 기다릴 텐데,  방문 예정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면 픽업도 나가고 그럴 텐데, 요즘 밤마다 나를 수시로 찾아오는 건 시커먼 모기다. 기온이 떨어지면 모기 입이 쪼글쪼글해져서 피를 빨지 못한다는데, 요즘 보일러를 켜기 때문인지 우리 집모기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그렇게나 나를 찾아온다.


잠깐 모기 이야기로 샜지만, 다시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아마 지난해부터 읽는 재미를 붙인 것은 소설이다. 원래 소설엔 통 흥미가 없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갈등 없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듯 소설의 기본 골자도 갈등에서 비롯하는데, 현실의 삶을 버텨내기에도 빠듯한 마당에 굳이 가상의 갈등까지 내게 보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도 모르게 입맛이나 성격, 취향이 변하듯  어느새 갈등 지향적(?)인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소설을 읽다 보니 일전에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다는 글을 통해 좋아하는 마음을 통렬하게 고백한 박상영 작가를 비롯해 아끼는 소설가 몇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들의 문장을 품에 소중히 안고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와, 어떻게 이렇게 썼지? 여기를 어떻게 이렇게 묘사했지? 싶은 찬탄을 이어가다 보면 슬그머니 '나도 한번...' 하고 그 자리에 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설은 일단 배경이 내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점에서 근사하다(구질구질한 현실 고증은 딱 고만큼 짜증 나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뿐이지 그/그녀들의 성격이며 식성, 생활패턴, 스케줄 등을 어지간히 파악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진짜 존재하는 사람일까? 친구가 너무 사실적으로 가상의 인물을 잘 설명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뒤따라온다. 어차피 큰 이슈가 없는 한 그들이 나와 만날 일이 없을 텐데, 그러면 그들 소설 속 등장인물이랑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살면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다는 희박한 확률을 배제하면,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그들은 내게 소설 속 인물과 다름이 없고 시선의 방향만 바꾼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소설 속 인물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인생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는 거고.   


좋았어! 그럼 내 인생을 노트북으로 토닥토닥 옮기기만 하면 소설 한 편 완성!이라는 희열에 잠깐 젖지만, 가만. 인생의 어떤 장면을 소설로 만들어야 하고 누구를 등장시켜야 하는지의 문제가 뒤따른다. 왜 수많은 중 그 장면 이어야 하는지, 왜 수많은 그들 중 하필 그들이어야 하는지, 등장시켜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막막하기만 하다. 애당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긴 한 건가. 아아. 그러면 나는 좋아하는 소설을 끌어안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막가는/나른한 연애를 못해본 거야!" "나는 왜..."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주변 인물들의 경험을 빌려 쓴 건지 알 수 없지만 그토록 새롭고 생경한 경험들, 그토록 숱하게 마주친 일상의 장면을 소설로 만들어내는 시선과 문장, 그리고 또... 아무튼 한 편의 소설 안에 녹아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부럽다. 문장 안의 쉼표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박상영 작가와 더불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정영수 작가가 최근에 소설집을 펴내고 이런 인터뷰를 했더라. "소설은 여린 사람들을 위한 작은 이야기"라고. 나는 이 말이 소설의 정의에 딱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잠깐 사귀던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같은 건물에 사는 여자가 자기 집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더라."

"왜?"

"물어보니까 열쇠를 잃어버렸대."

"몇 살인데? 다 큰 어른이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울어?"

"그 마음이 어땠겠어. 힘든 거 꾹꾹 누르다가 거기서 터진 거지..."

그때 아차 싶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참 서투르구나. 스치듯 안녕, 헤어진 사이지만 그 친구와 나눴던 대화 한토막은 오래도록 잊히질 않고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소설은 열쇠를 잃어버려 현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건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를까. 나는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고, 들여다보는 것에 참 서투른 사람이라 지나고 나서야 아차, 하고 무릎을 칠 뿐이다. 나를 스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여린 마음을 데리고 사는 얼굴은 어떤 얼굴인지 나는 도무지 알아볼 길이 없다.


쓰고 쓰고 쓰다 보면 내 안의 서투르고 무딘 시선이 닳아서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투명한 시선으로 여린 마음을 늦지 않게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린 마음을 한 얼굴을 알아보기에 나는 둔하니까 계속 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소설은 그다음의 얘기다. 나도 정말 쓰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들 어떻게 어른이 되셨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